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레이션에는 긴장도 두려움도 동정심도 없었다. TV 화면 속의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그 뒤의 트럭에서는 비닐 앞치마를 입은 남자들이 손에 바리깡을 든 채 내리고 있었다. 바뀐 화면에서 바리깡을 든 남자의 손은 무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양들의 살점을 함께 깎아냅니다. 영상과 달리 나레이션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에어컨을 켠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는 나의 TV에는 동물 복지를 다룬 다큐가 나오고 있었다. 털과 함께 가슴살이 뜯기는 거위,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너구리,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가는 토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뿐이었다. 양의 비명소리가 나오는 TV를 켜둔 채 냉장고로 간 나는 아이스크림과 스푼을 들고 돌아와 TV 화면을 돌렸다. 뭔갈 먹을 때 보고 싶은 영상은 아니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 후엔 이런 생각을 했다. 타인의 고통이란 이런거지.

 

 아마 그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얘기해봤자 내 고통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린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다 만나서, 어쩌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쩌다 친밀한 사이가 되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우리가 싸우지 않는 대화는 점심 식사 메뉴나 오늘의 코디에 어울리는 신발을 고르는 것 정도였다. 혹은 누구 하나가 양보하여 함께 영화를 볼 때 라던지.

 

 그 사람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고 고쳐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날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충분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것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내 고통을 그 사람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주길 바랐다. 나도 모르는 내 감정의 원인을 찾아 말로 정리해주기를 바랐다. 나도 그러지 못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더 힘들어져갔고, 휴대폰에서 서로의 이름을 지우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뚜껑을 덮고 다시 채널을 돌리자 이불과 옷의 장식용 털과 키링이 된 거위, 너구리, 토끼, 양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단체의 대표가 참여와 협조를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한 사람분의 데이터가 지워진 폰을 들어 공손히 모으고 있는 대표의 손 옆에서 반짝이는 후원 전화번호를 눌렀다.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건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전화 한 통 정도라는 사실에 자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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