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강단 위의 연사가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손에 쥔 레이저 포인터를 만지작거리며 앞으로 나섰고, 조명 기사가 황급히 핀 라이트를 옮겨 그녀를 따라갔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알죠."


그녀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어떤 양이 자연의 섭리대로 태어났고, 어떤 양이 몸 속에 전선이 가득한 지 말입니다."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쪽으로 몸을 돌려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인공 양과 자연 교배로 태어난 양 두마리가 순진한 얼굴로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단 위를 걷는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청중들이 숨을 죽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도 계실 겁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


숨 죽이는 사람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약간의 경외와, 약간의 두려움.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일테였다. 그녀는 청중들의 시선에 지지 않기 위해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공존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하고, 함께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름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름은, 그냥 다름일 뿐입니다."


정적이 도무지 깨질 줄을 몰랐다. 연사는 다시 처음 그녀가 양 이야기를 시작하던 자리로 돌아갔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서는 안됩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다리를 바꿔 꼬면서 팔걸이에 기대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부터, 저로부터 그 이해가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연사는 청중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저는, 눈을 떴을 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입니다."


순간, 박수 소리가 끊어졌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말을 하는 소년의 눈은 아주 까맣고 단호해서, ‘알고 있어도 말해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눈빛에 기분이 팍 상했다. 여름 밤 초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격한 것은 우리집 양떼뿐이다. 예전에 돌봐 드리던 노인의 소개로 찾아간 이 소년이 아니었다면 우리집 양들이 그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방금 전까지 양들 사이에 서서 양들과 눈을 맞추고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새 내려앉은 이슬을 눈치챈 소년이 잔뜩 인상을 쓰고 어깨를 툭툭 털었다. 그는 아주 피곤해 보였다. 나는 이 새벽에 자다가 끌려 나오다시피 한 그가 좀 불쌍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이 새벽에 당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 그를 데려와야 했다. 따지고 보면 더 불쌍한 건 내 쪽이다. 내가 동물과 얘기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면 당나귀가 나를 개울가에서 걷어찰 때 욕을 퍼부어 주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누나가 건넨 유리병을 눈에 문지르며 소년을 흘겨봤다.


정말로 물어본 거 맞아?”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 누나가 내 뒤통수를 갈겼다. 버릇없이 굴지 마! 누나는 언제나 그들을 동경했다. 소년을 포함해 마을에는 옛날부터 그런 사람들이 몇 있었다. 동물과 말이 통한다 거나 유난히 별을 읽는 눈이 밝고, 작물이 병에 들지 않게 지켜주는 사람들. 우리를 대할 때면 어색하게 얼굴이 굳고 어지간한 대가 없이는 우릴 도와주지 않았고, 또 아무리 작은 일이든 종이에 기록하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누나는 굳이 내 말투가 엄청난 모독이라고 느끼나 보다.


양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다시 거기로 데려가 주시죠.” 소년은 나를 깡그리 무시하고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하고 초원으로 가는 지름길을 가리켰다. “이 길로 가도록 해요.” 안개는 아까보다도 훨씬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안개를 뚫고 작은 개울을 지나면 꽤 근사한 초원이 나온다. 밤에는 양들을 풀어 반딧불을 먹게 하는 초원이다. 동물 우리 뒤 오동나무 옆에는 우리가 사는 오두막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제 밤까지는 있었다. 오동나무도, 우리집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프리스비는 재빨리 그녀가 찾는 병을 건네준다. 병 속의 유리 구슬이 도르륵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구슬 구르는 소리가 다른 이에게 들릴까 병을 꽉 끌어 안고 프리스비의 가게를 나섰다.

 

 작고 푸른 유리 구슬은 그녀의 여덟살 난 아들의 것이었다. 장난감이라곤 나뭇가지나 열매의 단단한 껍질이 대부분인 이 가난한 바닷가 마을에서 유리 구슬은 비싸고, 보기 드문 것이었다. 한 달 쯤 전 이름도 알 수 없는 먼 나라에서 왔다는 외국인 관광객이 꺼내놓은 유리 구슬 다섯 개에 온 마을의 아이들은 마음을 빼앗겼다. 투명하고 단단하고 푸른 빛 속에 온갖 색을 품고 있는 그 구슬은 마치 지구 같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 마음을 뺏겼던, 우주에서 본 지구. 푸르고 오묘하고 아름다운 구. 외국인이 두고 떠난 다섯 개의 구슬은 마을 아이들의 손에서 손으로 돌아다녔다. 그 중 두 개는 깨졌고, 하나는 사라졌으며, 두 개는 여전히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남아있었다.

 

 그 하나의 구슬이 사라진 즈음이었다. 그녀의 아들이 먼 나라 이야기를 자주 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 나라에는 얼음 위에 사는 날지 못하는 새가 있다고, 밤 하늘을 밝히는 분홍빛 달이 있고, 하루종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있다고 꿈 같은 얼굴로 종알거렸다. 처음에는 아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던 그녀는 어느 순간 무서워졌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들의 볼이 점점 더 붉어지고, 눈이 까맣게 빛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십오년 전 사라진 언니의 것과 같았다.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는 어린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얼굴을 빛내곤 했다. 아들에게서 언니의 얼굴을 본 그녀는 아들의 생활을 살폈다. 집을 나선 아들의 뒤를 몰래 따르며 들키기를, 혹은 들키기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미행이. 그리고 아들의 비밀스러운 일이.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그녀는 아들이 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프리스비의 중고품 가게에 들어가 도자기로 된 병들을 쓰다듬었다. 그 중 입구의 이가 나가고 별 특징 없이 눈에 띄지 않는 잔금이 간 흰 병 안에서 구슬을 꺼냈다. 아마 사라졌다는 하나의 구슬일 것이었다. 아들은 구슬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햇빛 알에서 오래도록 바라보고, 입 속에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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