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 (NBC, 2013-2015)

한니발 렉터 X 윌 그레이엄

Keyword

'대가', '볕', '첫'

뱀파이어 선생님 X 미신을 믿지 않는 학생



*


크로포드 교수의 자살은 생각보다 시설을 뒤집어 놓지는 않았다. 몇 달 전부터 헛것이 보인다며 새벽 시간에도 학생 기숙사동까지 내려와 난리를 치던 그였다. 뿔 달린 사슴이, 불에 타고 있는 나무가, 버섯이 돋아나는 피부를 가진 학생들이… 가뜩이나 흉흉한 때에 그런 형상을 본다고 말하고 다녀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모두 아침 식사를 무난하게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크로포드는 미래를 보는 쪽도 아니었잖아.” 알란 블룸이 무심하게 말했다. 


“장례는 없겠지?” 마치 ‘다음 수업은 경전 풀이 시간이지?’ 라고 말하듯 평이한 말투로 그가 덧붙였다. 당연한 소리. 윌 그레이엄은 멀건 죽을 한 스푼 크게 뜨며 대꾸를 대신했다. 





_

“가을이 오긴 하나 봐, 해가 짧아지네.” 알란이 복도의 아치형 창가에 기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래서? 윌. 다시 해가 길어질 계절이 되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해.” 알란은 ‘졸업’이라는 단어를 꺼리곤 했다. 윌은 그보다 더 필사적으로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피했고. 알란은 딱히 윌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봐, 너도 크로포드 밑에서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 맞는 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는 ‘멘토’였다. 불같은 성격에, 사람을 몰아붙이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윌은 크로포드가 이상증세를 보이고 나서부터 어느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단 사실이 기분이 한없이 불쾌했다. 뒤집히는 계절보다 사람들의 냉정함이 더 소름 끼쳤다. 




반세기 만에 찾아온다는 겨울은 유독 지독할 예정인지, 해가 짧아지고 이슬 대신 서리가 내리는 날이 오면서부터 사람들이 한둘 죽기 시작했다. 몇 달 전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짐승에 당한 듯 전신에 피를 모두 잃고 사체들이 발견되더니, 요즘은 자살자가 대부분이었다. 평생 처음 겪어보는 겨울의 전조라지만, 윌은 아직 오지도 않은 안갯속을 걷는 듯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한니발에게 부탁하는 건 어떨까?” 멍해진 윌의 표정을 살피던 알란이 불쑥 말했다. 


“한니발?” 


“렉터 교수님 말이야.” 


“그러니까. 넌 ‘한니발’이라고 불러?” 


“그건, 그냥… 부모님을 통해서 알던 사이뿐이야.” 그답지 않은 말투였다. 눈도 귀도 막고 살고 싶은 윌이었지만 알란의 일이니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알란, 그 사람은… 네 나이의 몇 배는 될걸. 게다가…”


“바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당황해서 눈이 커진 알란의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이번에 시선을 피하는 사람 또한 알란 쪽이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됐어, 그만 얘기하자. 그냥 이런 시기에 새로 멘티를 받아줄 만한 교수는 그 사람뿐일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어.” 




윌은 더 캐묻기를 관두고 탑 뒤 쪽으로 이어지는 공터로 시선을 돌렸다. 관리인들 네다섯 명이 큰 포댓자루 같은 것을 힘들여 옮기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꼭, 여기까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알란의 말이 맞겠지. 그는 대부분 문제에 옳은 답을 제시했다. 밤이 더 길어지기 전에 졸업에 대해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윌은 부은 눈가를 꾹꾹 눌렀다. “렉터 교수, 침탑 쪽 별관에 머물던가?”





__

윌리엄 그레이엄. 


흔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는 어린 시절. 부모 중 한 사람의 꾸준한 부재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와 잦은 이사. 아주 어릴 때부터 시설에 들어오는 아이들과는 달리 청소년기가 다 지날 무렵에 이 곳으로 온 학생. 나이에 비해 푸석한 모발, 늘 튼 눈가와 입술. 고질적으로 불면이 있었고 가장 간단한 수준의 영양소 섭취에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복도에서 가끔 손을 떨거나 넘어지면 그와 친한 유일한 학생인 알란 블룸이 부엌에서 챙겨 둔 퀴퀴한 비스킷을 쥐여 주곤 했다. 시선을 거의 마주하지 않았고 질문을 받았을 때는 말을 더듬거나 너무 장황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닌 듯했다. 대화를 시작한 사람을 당황하게, 혹은 불쾌하게 만들려는 듯 보였다. 그 나름의 거리 두기 기술일 것이었다. 벽을 견고히 쌓아 결국은 투명해지기를 택하는 그 방식이 렉터의 눈에 띄었다. 




[H. 렉터 교수님께,

찾아뵙고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졸업 의례에 관해서 

W. 그레이엄]




공손한 첫 문장의 글씨에 비해 두 번째 문장은 쪽지를 부치기 직전 서명 위에 끼워 넣은 듯 비뚤어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종이의 접힌 면에 비밀을 급하게 털어놓듯 ‘괜찮으시다면’하고 휘갈겨 쓴 그의 필체. 렉터가 누군가에게 이런 태도의 서신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편지지도 아니고 손바닥만 한 빈 종이며… 평소라면 그 무례함에 불쾌해졌겠지만, 그레이엄의 세 가지 필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메모가 퍽 맘에 들었다. 윌 그레이엄은 공개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미움받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높은 성적에 반비례하는 사회성 탓에 인기가 있는 편도 아니었다. 아주 작은 소문 하나만 따라붙어도 넘치는 적을 만들게 될 것이고, 해명도 변명도 하지 않을 그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그레이엄을 고립시키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렉터는 다시 쪽지의 필체를 관찰하며 생각했다.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을지도. 




그는 이내 윌의 쪽지가 전달된 모양 그대로 다시 접어 서랍에 넣으며 붉은 깃털로 장식된 펜을 책상에서 치웠다. 윌이 혹시라도 부담스러워하지 않기를. 책꽂이에 놓아둔 작은 액자 또한 덮어두려 멈췄다. 방문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L자 모양으로 휜 별실 안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마주 앉으면 시선을 뗄 수 없을 액자는 찬란하고 어지러운 색채의 그림을 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거인이 무언가를 쥐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렉터는 그림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비웃음을 닮은 미소가 얼굴에 떠오르는 탓에 잠시 입가에 힘을 줘야 했다. 




그때였다. 노크 세 번. 예상한 것보다 무게가 있다. 


“들어오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윌 그레이엄이 별실로 들어왔다. 10분 전부터 문 너머로 서성이던 그의 병든 체취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크로포드 교수에 관해서는 유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만나서 반갑다고 시작하던데요.”


“우리 둘은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군요.”


그레이엄은 그 말에 렉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마치 그 사실을 지적받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고 잔뜩 엉킨 앞머리를 이마로 쏟아 내렸다. 


“듣자하니 예지력이나 독심술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레이엄 군. 혹은 둘 다요. 생전의 크로포드 교수도 그레이엄 군을 자주 칭찬했어요.”


“벌써 생전이라고 하시네요. 오늘 아침에 발견되셨는데.”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죠. 그레이엄 군은 그 미래를 보지 않았습니까?”


“저는 미래를 볼 줄 아는 게 아닙니다. 그저… 설명해 드려도 잘 이해가 안 될 거 에요.” 


“해보세요.”




Try me. Me를 발음하는 렉터의 입술이 아주 빨리 열렸다가 얇게 다물렸다. 새로 온 초빙교수라며 단상 앞에 섰을 때부터 느꼈지만, 렉터 교수는 말을 할 때 이가 거의 보이지 않게 구강구조를 움직였고 정확히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발성했다. 혹시 아주 추한 치아를 가진 걸까? 그의 생각이 딴 곳으로 흘러가는 걸 읽기라도 한 듯 렉터 교수가 보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윌은 말 돌리기를 포기하고 한참 전에 렉터가 앉으라며 손짓했던 나무 의자에 앉아 그를 마주했다.




“저는 그냥 행동 속에서 패턴을 보는 것뿐입니다. 흘려 보아도 좋을 것들을 좀 더 잘 기억하고… 사람들은 의외로 예측할 수 있거든요. 특히 이곳의 사람들은 비밀을 만들기가 어렵고 패턴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는 법이 거의 없으니까요. 마음이나 생각을 읽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 그들의 몸이 말하는 것 등을 지켜보면 그냥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뿐이고요. 크로포드 교수님이 유난히 치켜세워주시긴 했지만. 정말로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렉터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찰나였지만 윌은 그의 도드라진 송곳니를 놓치지 않았다. 추한 광경은 아니지만, 확실히 감추고 싶을 수도 있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렉터가 말했다. 




“이렇게 힘차게 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뭐… 제가 열정을 가진 부분이니까요.” 쭈뼛대는 그레이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렉터가 어느새 다 우려져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차를 따랐다. 


“열정은 좋은 것이죠. 피도 잘 돌게 해주고.” 


“피요?” 의학을 전공하면 저렇게 생각하게 되는 건가? 


“피를 달빛 아래에서 본 적 있나요, 윌? 아주 까맣게 보이지요.” 




윌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렉터가 건네준 찻잔을 들고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별실을 관찰했다. 렉터의 의도대로 윌은 몇 번이나 작은 액자를 훔쳐봤다.




“저 그림이 마음에 드나요?”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잘… 삽화는 아닌 것 같은데요.”


“신을 묘사한 것이랍니다. 먼 이국의 신 중 가장 아버지 되는 신이었지요.” 거기까지만 말한 렉터가 서성임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졸업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그 대신 윌은 저 아버지 신이 누구인지 묻고 싶어졌다. 어째서 저런 흉측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뜯어먹고 있는 건지, 어째서 저런 눈에 띄고 천박한 색을 입혔는지, 언급한 이국은 어디이며 대체 신을 기리는 그림을 저렇게 그리는 곳은 어디인지, 렉터 당신은 그곳에 가본 적 있는지… 


“이교도의 우상화를 시설에 가져와도 되나요?” 대신 터져 나온 질문은 이것이었다. 윌은 멋쩍은 기분이 들어 손등을 조금 긁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윌?” 윌은 꾸중이라도 들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렉터는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미롭게 눈을 빛낼 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윌의 교수가 돼서 졸업 의례까지 함께 한다면 그 대가로 저는 무엇을 얻게 되나요?”


“대가요?” 윌은 순간 렉터가 금전을 요구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돈이라고는 수중에 없었고 있어 본 적도 없다. 렉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저는 드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데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뭔가 요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잔뜩 움츠러든 윌의 어깨를 눈치챈 렉터가 느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질적인 걸 부탁하는 건 아닙니다. 제 식사를 돕는 건 어떨까요, 윌?” 아마 렉터에게는 저 표정이, 최선을 다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인 거겠지. 정교하게 만들어진 해부모형을 볼 때와 비슷한 미묘한 불쾌함을 떨치려고 윌은 또 한 번 시선을 피했다. 


“급식소나 식당에서는 뵌 적이 없는데, 그건 식사할 때 도움이 필요하셔서 그랬던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아주 까다로운 식단을 지켜야 하거든요. 일종의… 지병이라고 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지병이 있다는 남자의 식사를 돕는 것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다면 윌에게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렉터는 친절하고 교양 있어 보였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몇 달 내로 자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천천히 대답했으면 좋았을 걸, 윌은 왼손이 계속 조금씩 경련 중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자세한 건 차차 말씀 주시겠죠.”


렉터가 아주 조그맣게 ‘물론이죠’ 라고 말하며 두 사람 앞에 놓인 다기를 치우자 멀리서 종이 울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윌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필체만큼이나 성의 없는 인사를 웅얼거리고는 별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렉터가 권한 차의 신맛이 입에 남아 텁텁했다.





___

겨울과 졸업을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윌 그레이엄의 삶에서 가장 순조로운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몇몇 아이들은 체구가 좋다는 죄로 공터에 모여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일어나 장작을 팼고 더 어린아이들은 땔감의 개수를 센 뒤 헛간으로 날랐다. 잠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렉터 교수는 그 일과를 관리하기로 지원했고 (‘새벽에는 피가 잘 돌지요.’ 같은 말 따위를 하며), 그가 뿌연 안경을 쓰고 아이들이 부르는 숫자를 괴상한 펜으로 종이에 적거나, 꾸물거리는 아이들을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재촉하는 내내, 윌은 비루한 등불을 들고 곁을 지켰다. 렉터가 굳이 따라 나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윌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을 받았다. 게다가 식사 시중을 들어주는 대가로 자신의 졸업 의례를 담당해주겠다고 한 렉터는 아직 윌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렉터는 여태 윌이 쓴 모든 관찰록이나 경전해석에 색깔별로 주석을 달아 조언을 주고, 화학 시험 때 쓸 계량법을 ‘조금 쉽게’ 고쳐 주기까지 했다. 역사 과목 대신 윌이 열정을 보인 ‘행동 관찰’에 대해 졸업 논문을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제시한 것 또한 그였다.




조바심이 난 윌은 알란에게 ‘대가’에 관해 물었다. 알란은 ‘식사 시중’이라는 개념에 몹시 혼란스러워했고 그게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식사 시중이라는 걸 몇 번이나 윌이 강조하고 나자 조금 재미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일단 그 시중을 들던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그가 뭘 먹는 모습을 본 적은 좀처럼 없지만… 농담이었던 거 아니야?” 그러면 어디까지가 농담이었던 거지? 윌은 저울대를 흔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날의 대화를 복기했다. 자꾸 떨리는 왼손 때문에 어느 쪽도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처음 겪는 겨울도 한번 추위를 맛보고 나니 두려워하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처음 해보는 난방 준비나 털실로 옷 만들기, 처음 입어보는 두꺼운 모자, 목도리 등에 신난 학생들 덕분에 시설은 오히려 더 쾌활해졌다. 양초가 소비되는 속도가 예상 밖이라 알란을 포함한 몇몇 학생들과 칠튼 교수가 시장까지 다녀오는 일도 있었다. 알란을 비롯해 거의 평생을 시설에서 산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 본 일이 까마득한 교수진들에게도 이 사안의 심각성보다 상황의 새로움이 더 흥분되는 일이었다. 새벽의 땔감 준비조도 이제 해가 너무 짧아진 탓에 모일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한동안 어슴푸레한 헛간 앞에서 렉터 교수를 보는 것으로 매일 하루를 시작하다가, 불쑥 루틴이 깨지니 어색했다.




어색함을 잘 버티는 사람이었다. 윌 그레이엄은. 대부분은 말이다. 

스스로 적응력도 뛰어나고 남의 일에는 오지랖 부리지 않고도 적당히 필요한 정보만 취할 줄 안다고 자신했다. 그런 윌은 지금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두꺼운 옷을 입고 몇 남지 않은 긴 양초를 등 안에 넣고 학생 기숙사가 있는 탑을 빠져나와 헛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달이 무겁게 하늘에 걸려 있었지만, 곧 시설의 일상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지금 윌이 시려오는 발을 끌고 스스로를 재촉하는 원동력은 호기심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기억할 수 있는 한 처음 타인에게 갖는 호기심. 언제부턴가 떨림이 멈추지 않는 왼손으로 든 등불보다 더 밝은 건 시커먼 밤하늘의 보름달이었다. 첨탑 끝에 닿아 있는 달이 기괴할 정도로 크고 밝아 보였다. 그 아버지 신의 미친 눈동자처럼. 윌은 자꾸 구역질이 나고 피 냄새가 나는 듯해 마른 입안을 씹으며 걸었다. 이내 익숙한 헛간이 어둠과 안개에 섞여 옅게 보였고, 렉터임이 틀림없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자 윌은 숨을 멈췄다. 친절한 멘토의 품에는 축 늘어진 몸의 어린 학생이 있었다. 윌의 방향에서 렉터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프랭클린. 나이에 비해 응석쟁이에 짜증이 많던 그 아이도 얼마 전까지 같이 땔감을 준비하던 학생이었다. 추운 공기 탓에 프랭클린의 목덜미에서 김이 나고 있어서, 이 각도에서 보니 꼭 렉터가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그릇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렉터는 그 생각을 듣기라도 했는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 액체는 체온과 비슷한 온도에서 보관하는 게 좋습니다.’ 라고 설명이라도 할 것처럼 평소 같은 얼굴이었다. 프랭클린은 잠옷에 피 몇 방울이 묻은 것 외에는 놀랍도록 평온히 잠든 모습이었다. 못 본 척하려면 늦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윌은 등불을 좀 더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 귓가에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을 믿나요, 윌?”


“위험한 질문을 하시네요.”


“교실 밖인데도요?”


“어디에 있더라도요.”




렉터는 조용히 프랭클린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아이의 몸이 땅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윌은 귓속에 울리던 박동 소리가 프랭클린의 심장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심장은 여느 때처럼 평온히 뛰고 있었다. 




“저도 죽일 건가요?”


“글쎄요, 윌.” 짐짓 심각하게 고민해보겠다는 듯 미간에 힘을 준 렉터는 기이하게도 처음 별실에서 보았을 때 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제가 올 걸 알고 계셨군요.”


“윌은 아직 모르겠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새로운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정말 독특한 냄새가 난답니다.”


“지금, 저한테 냄새가 난다는 건가요?”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하겠냐만은. 윌은 순간 얼굴에 불이 끼얹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렉터는 그 질문에 소리 내서 웃었다. 아주 짧은 웃음이었지만 그놈의 송곳니가 검은 입속에서 달빛을 받아 또렷이 보였다. 윌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저 송곳니가, 늘 들릴 듯 말 듯한 웃음소리가, 친절한 듯 무자비한 눈빛이 모두 그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세상 자체에서 냄새가 난답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제게 대가를 치르게 할 건가요?” 


물어 놓고 대답을 듣지 않는 버릇이 있군. 렉터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윌. 애벌레에게 볕과 먹이를 주고 고치 너머로 속삭일 수는 있지만, 거기서 어떤 본성을 가진 존재가 나올지는 제가 절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렉터의 시선이 첨탑의 반대편에서 일출의 기미를 찾았다. 공기 온도가 바뀌고 있었다. 곧 종이 치고 하루가 시작될 것이었다. 윌은 황야가 된 땅에 나뒹구는 프랭클린의 담요를 집어 들고 렉터 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교수님 말이 맞았군요.” 윌이 렉터의 입가에 옅게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정말 달빛 아래에서는 새까맣네요. 고치 밖으로 나온 덕인지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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