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스물 일고여덟 정도이고 앞서 받았던 인상보다 더 얼굴이 하얘서 역시 미남이구나 생각했어요. 근데 미남이면 뭐 하나요, 제가 그 자식 얼굴 뜯어먹으며 일할 것도 아니구요.”



후배의 맥주 오백 잔이 금새 바닥을 보였다. 빈 잔을 허공에 들고 흔드는 후배를 본 알바생이 후다닥 달려와 그 잔을 가져갔고 후배는 빈 주먹을 테이블 위로 내려쳤다. 치킨 뼈를 바를 때 썼던 포크가 그릇과 부딪쳐 덜그덕 소리를 냈다.



“아니 글쎄, 팀장이랑 상무랑 와가지고 막 잘생긴 부사수 붙여줘서 자기들한테 고맙지 않냐는 거 있죠? 돌았나 진짜.”



어찌나 씩씩대며 열변을 토하는 지 귀 뒤에 야무지게 꽂아주었던 칼 단발이 쏟아졌다. 얼굴을 반쯤 가린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손바닥으로 치워버린 후배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윙크를 하듯 왼쪽 눈만 느리게 깜빡 거리는 얼굴. 머리 꼭대기까지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밀어버린 머리카락은 금새 다시 쏟아져 눈을 가렸다. 고개를 흔들며 머리카락을 치워보려고 애쓰는 주정뱅이를 대신해 귀에 머리를 넘겨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가 밝아져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내가 자신의 말에 동의해주기를 기다렸던 모양인지 알 수 없었지만 후배가 다시 모터를 단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막 꽃 같은 후배 들어와서 너무 부럽다면서. 난 니들이 더 부럽다 이 새끼들아.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솔직히 후배 가르치는 거 귀찮잖아요.”



알바가 새로 채워온 오백잔을 빼앗듯이 손에 쥔 후배가 금새 또 잔을 비웠다. 자꾸 소매로 입을 닦아 버릇해서 셔츠 소매에 립스틱 자국이 가득했다. 코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에 턱을 괸 나를 보던 후배가 웃었다.



“언니, 나 취했나바.”

“…갑자기?”

“응. 언니 앞에 잔 두 개가 네개로 보여요.”



아하하하하하! 후배가 박수를 치며 웃더니 화장실을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휘청 할 것 같아서 아까 신발을 바꿔 신은 참이었다. 여의도로 출퇴근 하는 커리어우먼 같은 셔츠와 치마 밑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아디다스 운동화가 보였다. 저걸 신고 발목이 꺾여 바닥에 구르지는 않지 싶었다. 평소라면 따라 일어났을 테지만 오늘은 그냥 후배를 혼자 보냈다. 후배가 밀고 나간 문이 닫히자마자 휴대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손가락이 액정을 밀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여보세요?”

[ 선배! 시끄럽네. 아직 있어요? 처음 거기? ]

“응, 아직 처음 거기.”

[ 오래도 있네. 엄청 씩씩거리더니… 장난 아니게 들이붓고 있나 보네. ]

“내 앞에 잔 두 개가 네 개로 보인데.”

[ 많이 마셨네. ]

“많이 마셨지… 잔은 사실 하나거든.”



주위가 시끄러워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수화기를 귀 가까이 붙이면서 소리를 키웠다. 낮은 목소리가 껄껄 웃는 걸 좋아했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아 아쉬웠다.



[ 저 지금 야근 마쳤는데. 지금이라도 갈까요? ]

“오지마. 이제 파할거니까.”

[ 진짜? ]

“진짜.”

[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구요. ]

“오냐.”



전화는 금새 끊어졌다. 






나이는 스물일고여덟 정도이고 앞서 받았던 인상보다 더 얼굴이 하얘서 역시 미남이구나 생각했어요.”

 

그 말을 하는 S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서 나는 궁금해졌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호감을 가질 수 있을까?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푸는 것이 어려운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엔 제가 주문을 받아서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거든요? 어쩜 목소리도 제 스타일인 거 있죠. 운명인가봐요.”

양손으로 제 볼을 감싸며 웃는 S는 벌써 사랑에 빠진 듯 예뻤다. 그래서 번호는 물어봤어요? 라는 내 질문에 금방 시무룩해지며 아뇨, 어젠 얼굴보느라 놀라서 어버버 했어요. 다음에 오면 꼭 물어봐야죠!” 하는 모습도 솔직해서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라고 물어보려는데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앗 손님왔다. 저 일하러 갈게요 작가님! 제 얘기 들어줘서 감사해요!” 밝은 미소와 함께 어서오세요! 하고 뛰어가는 S의 뒷모습을 보며 S와 이름 모를 그와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 위치한 작은 카페인 이곳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좋은 큰 창이 있다. 지난 연말 두 번째 책을 출간하고 잠시간의 휴식기간 겸 다음 원고를 준비하기 위해 나는 매일 이 곳에 와 짧은 글을 한꼭지씩 쓰고 있는 중이다. 다음 책에 도움이 될지 안될지 모르는 나의 글은 하루에 한 사람씩 지나가는 사람을 골라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내 나름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지금까지 52개의 짧은 이야기를 적어냈다. 매일 이곳에 와 2-3시간씩 앉아있다보니 오전 타임 알바생인 S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S의 연애상담도 들어주게 되었다. 일주일 전 (S의 말을 빌리자면)운명처럼 나타난 잘생긴 손님에게 첫눈에 반한 S의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사실 그 남자와 S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저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히는 S를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언젠가 써먹을 수 있지도 않을까 했고.

 

이십대 초반인 S를 보고 있자면 내 옛날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옛날 그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쳐준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우아하지만 날렵한 그 곡선들은 어머니의 성품을 똑 닮았다. 고요하지만 성격이 급한 분이셨지. 그는 생각하며 수첩을 덮었다. 더 읽어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그는 온종일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라 어지러운 참이었다. 가장 마지막 기억은 몇 년 만에 삭발하고 나타난 그의 머리를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쓸어넘기던 어머니의 손길이다. 하나도 놀라지 않은 얼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 건 오히려 그 자신이었다. 전부 알고 계셨구나. 철자를 틀릴 때마다 찰싹찰싹 등을 때리던 그 손으로 이제는 당신보다 키가 더 커버린 자식의 민머리를 쓰다듬던 어머니. 굳이 안 도망갔어도 될 걸 그랬다.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어머니는 그때 작게 웃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짧은 재회가 지나갔고, 쇠약해져 누운 것은 어머니였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병원 복도에서 몇 번이나 주저앉은 것은 그였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전보를 받았고, 며칠을 달려 만난 어머니의 육신은 마침내 급하게 마음을 먹을 일이 없는 곳에 누워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남겨진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가져가라며 떠맡은 상자에는 몇십 년 분량은 족히 될 수첩들이 있었다. 가죽 노트부터 판촉물용 메모지까지, 어마어마한 양을, 똑같은 필적으로 채운 어머니. 무엇이 중요한지 구별해 내기에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 자신에게 버려지듯 넘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네 번째 상자를 뜯어보고 있었다. 생전의 어머니는 대체 어떤 일상을 지냈기에 이렇게 믿을 수 없이 많은 글을 남겼을까? 이 글은 다 무엇일까? 기상 예보가 적힌 페이지 뒤에는 오늘의 장 볼거리가 적혀 있고, 받는 사람이 계속 바뀌는 편지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의 일기, 백과사전에서 무작위로 베껴온 듯한 빽빽한 설명. 어머니에게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던 걸까? 일주일을 꼬박 매달렸지만, 어머니의 필기는 끝이 없었고, 이제 그가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어둠 속으로는 어머니의 필적이 둥둥 떠올랐다. 


그렇게나 많은 글을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에 관한 내용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전날 삶았던 감자가 유난히 물렀다거나, 볼리비아의 우기에 대한 기록은 있었지만, 어머니가 혼자 낳아 몇 년간 길러낸 그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픈 걸까? 머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뎅강 잘라버리고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무서워 다락에 숨던 날을 회상했다. 쿰쿰한 먼지 냄새를 맡다 보니 혼나면 어쩌지 하며 졸이던 마음이, 꾸짖어도 좋으니 나를 찾아내라고, 나를 보고 화를 내 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으로 바뀌었다. 어머니는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면서도 찾지 않았었다. 머리칼을 뭉텅이 그대로 다락에 버려두고 겨우 기어 나왔었지. 그 날 저녁에도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에게 글씨 쓰기를 가르쳐 주셨다. 마지막 날 몰래 들른 다락방에는 그 뭉텅이가 그대로 있었다. 그 뭉텅이만큼의 머리가 또 한 번 자라는 동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아니, 나는 조금도 슬프지 않아. 

2018.09.16



그 것은 옛날 그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쳐준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모난 곳 없이 꺾은 선들과 일그러진 곳 하나 없는 정확한 동그라미. 그가 편지 봉투에 정갈히 수 놓인 글씨의 주인을 알아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편지들을 그러모아 쥐었다. 꼭꼭 봉인된 어머니가 적은 수많은 편지가 두 손 가득히 잡혔다. 


동네의 서신이란 서신은 모두 도맡아 적어주던 어머니였다. 자네 필체가 고우니 대신 좀 적어주소. 어머니는 항상 예예, 웃으며 대필을 해주었다. 하지만 대필을 끝내고 나서는 그에게 속마음을 말하곤 했다. 사실 어머니는 대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글씨를 쓸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렇다고 했다. 엄한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계집애가 글은 배워 무엇하느냐. 글짓기 하여 무엇에 쓸테냐? 정 글이 배우고 싶거든 글씨를 정갈히 쓰거라. 삐뚠 획에 손등 회초리 한 대. 아래로 기울어지는 문장에 종아리 한 대. 그리 배운 글씨였다. 어머니는 그리 배운 글씨로, 제 글은 못 쓰고 다른 사람 편지만 대필하다가 가셨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그는 손에 쥔 봉투를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에게. 사랑하는 어머니께. 아버지께. 그리운 우리 언니야. 어머니가 그 예쁜 글씨로 한자 한자 눌러 담은 마음이 서랍 속에 가득했다. 대필한 편지들은 다 우표 날개를 달고 멀리 멀리 닿았는데. 어머니의 마음은 이 서랍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구나.




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비대칭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정교한 조각품인 알라이드의 경우 완벽한 대칭으로 사람의 눈을 홀리게 한다.

오늘도 아름다운 알라이드.

사람들은 너도나도 알라이드의 외형을 칭송했다. 하지만 칼란은 자신이 만든 알라이드를 볼 때마다 자신의 강박증을 저주한다.

알렉스를 떠올리며 만든 알라이드. 그의 팔, 다리, , , , 모두 똑같이 만들고 싶었는데..

다른 모양의 속쌍커풀이 있는 눈,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 살짝 휜 콧대, 한쪽으로만 뻗치는 머리칼, 크기가 다른 손, 분명 이런 것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만들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깎아 내다보니 알렉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익숙한 듯 낯선 모습으로 남겨진 알라이드.


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대칭에 매력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칭은 건강을 암시하고, 나아가 완전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미지와 조우한 인간은 그 대상에 서사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이해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질병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사연을 붙여주던 그 고대의 습관은 수 만년을 지나고도 우리 안에 살아남았다. 그렇게 알라이드가 경배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스코틀랜드의 평지에서 처음 발견된 알라이드는 어떤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최초 발견자인 매카보이씨는 그저 오로라가 뜨는 방향을 향해 세워진 설치 미술인줄 알았다고 전했다. 처음 발견될 당시의 알라이드는 그저 거대한 구체였다. 빛을 흡수하는 재질로 코팅이 되어 멀리서 보면 마치 땅에 구멍이 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대한 구체. 사람들이 왔다 갈수록 그 모양은 점점 변했다. 하나였던 구체는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났고 모양 또한 변해갔다. 어두운 구체The Dark Orb라고 불리던 그들은 검은 눈사람The Black Snowman이었다가 이내 얼굴 없는 사람들The Faceless Peopl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날이 갈수록 아주 조금씩 인간과 비슷하게 변해가는 얼굴 없는 그들. 이전에도 외계의 침략을 겪고 친교한 경험도 있는 지구였지만, 이렇게 방문 의도는커녕 방문 경황도 밝히지 않은 존재는 처음이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한 캠프가 세워지고 허물어진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시간이 지나도 뚜렷한 성과가 없자 사람들은 아마 정신 나간 예술가의 장난일 것이라거나 더 큰 이슈를 덮기 위한 눈 가림막이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또 자연스레 서서히 대중들이 얼굴 없는 그들을 까먹을 무렵, 그들이 살아났다. 살아났다고 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있다. 그들은 구체일 때부터 살아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진행된 대화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지구인으로서는 정당한 질문이었다.

-       우리는 멀리서 왔습니다. 아직 당신들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을 가진 곳에서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러나 두려워 말라. 우리는 동맹The Allied이다.

지구인들은 알라이드를 믿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다소 힘 빠지는 태도로 그들의 정착을 허락한 이유의 20% 정도는 그들의 아름다움 때문일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렇게 또 새 이름을 얻은 그들은, 물리적으로는 어떤 한가지 정해진 형태가 없었지만 보는 사람의 의식에 따라 겉모습을 조절했다. 목격한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단 두 가지였다. 암흑과 같은 피부와, 이질적이고 완벽한 대칭

프리스비는 재빨리 그녀가 찾는 병을 건네준다. 프리스비가 그녀와 함께 이 일을 한지도 어느새 몇 년이나 됐다. 몇 번이나 겨울이 지나고 수백 번의 호통과 냉소를 버텨낸 프리스비는 어느새 그녀가 입을 떼기 전 짓는 미세한 표정으로 다음에 그녀가 뭘 말할지 알아맞히는 경지에 다다랐다그녀가 병을 기울여 바닥에 누운 남자의 입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죽은 지 오래인 듯 추운 공기에서도 퀘퀘한 냄새가 났다. 게다가 그녀가 아끼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어놓은 걸 보니 아무리 이름난 해결사인 그녀에게도 보기 불편한 죽음이 있는 모양이다. 프리스비는 양손을 얌전히 모으고 그녀가 시체의 -시체가 아니라면 정말 곤란할만한 행색의- 입가에 병에 든 액체를 조금씩 흘려 넣으려는 것을 지켜본다. 그녀는 오늘 밤, 평소와는 다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나 중요한 의뢰였던가? 프리스비는 문득 자신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이 거의, 아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큰일인데. 그녀가 뭐라도 묻기 시작하면 어쩌지? 프리스비는 안절부절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그녀의 표정에 집중했다. 찌푸리거나 무표정인 채로 작업에 임하는 평소와는 달리, 그녀는 절박하고 다급해 보인다. 그러던 그녀가 프리스비에게는 말도 없이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직접 양초에 불을 붙인다.  하며 붙은 성냥불과 순간적으로 밝아진 눈앞에 프리스비는 잠시 얼떨떨하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프리스비는 추위에 오그라 붙은 입술을 연다


아가씨, 제게 시키시면 될 일인데…” 


그러나 프리스비가 말하려 했던 문장은 문장이 되지 못한다. 한 손에 양초를 든 그녀가 아주 천천히 시체의 얼굴에 덮여있던 소중한 손수건을 거둔다. 프리스비는 그때, 그제서야 볼 수 있다. 그들의, 아니, 그녀의 이번 의뢰의 주인공은 프리스비 자신이었음을


프리스비, 내가 왔어. 늦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볼에 닿는 그녀의 손은 날씨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따스하고 부드럽다. 이제서야 프리스비는 여태 왜 그녀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왜 자신에게는 이 무덤가에 오기전까지의 기억이 없는지 깨닫는다. 병을 건네준 것은 자신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몸은 이 겨울에도 퀘퀘한 냄새를 내며 딱딱하게 얼어붙은 언덕 위에 뉘여있음을. 양초에 붙은 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아가씨, 저는 이제 어쩌죠?”


 

 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그 두개의 탑을 바라보며 저 탑들의 뒷면도 대칭을 이루고 있을까 궁금했다. 칠십여년 전 H의 모국인 RA에 신종바이러스가 나타났고, 섬나라인 RA는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신종바이러슨느 좀비바이러스의 한 종류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바이러스는 두 가지 형태로 발병했다. A형 바이러스는 감염된 순간부터 그 숙주를 좀비로 만들었고 B형 바이러스는 숙주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 두 바이러스는 같은 유형의 감염자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다른 유형의 상대에게는 공격성을 보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RA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저 알라이드를 기준으로 A지역과 B지역으로. H는 B지역에 속했다. RA의 B지역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 수 있었다. 그들은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 가끔 A형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물어뜯을 이가 없었고 그를 죽이는 방법은 다양했으니까. B형 인간들은 보통의 인간처럼 살다가 어느 나이가 되면 총살 당했다. 노화되어 에너지가 다 사라지기 전에, 그래서 발병하기 전에 죽는 것이 이 지역의 법이었다. 그렇게 B지역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왔다. 칠십년 전 갈라진 A지역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저 알라이드 근처에서 가끔 총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저곳에도 남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십년 전만해도 저 경계를 넘어가길 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알라이드 사이의 벽이 쌓이기 전 가족과 헤어진 이들이었다. 바이러스의 유형은 무작위로 정해졌다. 그래서 B형 인간들은 A형 가족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숨고, 감싸고, 도망쳤다. 대부분 그 가족에게 물려 죽었지만.

 이제 그 때 가족과 헤어진 이들은 거의 남지 않았다. B형 인강의 수명은 75세까지이기 때문이었다. 남은 건 그 때의 기억이 없는 이들과, 유품으로 남겨진 헤어진 가족의 사진만을 보관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H도 그들 중 하나였다. H의 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H를 낳았고 H가 태어난지 일년도 되지 않아 바이러스에 감연되었다. A형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B형 아버지는 노력했지만, H를 지키기 위해 이틀만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년데 집을 찾아온 군인을 따라 나서면서 사진을 넘겨주었다.

 

 

 

 

 

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랍도록 정교한 모습에 연신 셔터를 눌러대었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한참을 정신이 팔려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에 너의 얼굴이 들어왔다. 카메라도, 하다 못해 휴대폰도 손에 들지 않고 오롯이 알라이드를 바라보는 네 얼굴이 있었다.

 

 

"사진은 안 찍어?"

 

 

말을 건냈지만 조용했다. 처음에는 무시를 당한건가 살짝 당황했지만, 그 눈동자를 보고 알았다. 엄청 집중하고 있구나, 말도 안 들릴말큼. 나는 네가 놀라지 않게, 불러 세우는 일 없이 그저 가까이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네가 나를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눈이 곱게 접혔다. 무표정일 때는 쌩한 얼굴이 웃으면 순둥해졌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한번 말을 붙였다. 사진은 안 찍어?

 

 

"전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으려구요."

"실제로는 또 언제 볼 수 있을 지 모르니까?"

"뭐 그런 것도 있고,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요. 쓸데없는 데 힘 빼는 거 같기도 하고..."

 

 

민망한 듯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잘 찍고 못 찍고가 어딨냐며 너스레를 떠는 나에게 네가 진지하게 말해왔다. 저는 진짜 못 찍어요. 심각하게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나와 몇번 실랑이를 하다가 이내 휴대폰을 꺼내든 너였다. 사진 하나 보여줄테니 그거 한 번 봐봐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내민 사진은 라면이었다. 젓가락으로 라면 가닥을 한껏 들어올린 채 찍은 듯 했는데, 화면 상단부터 하단까지 라면 가닥만 찍어놓은 사진이었다. 나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게 뭐야? 클클거리는 내 손에서 휴대폰을 거두어 간 네가 비죽거렸다.

 

 

"거봐요, 못 찍는다고 했잖아요."

"알았어요."

"왜 사람을 못 믿어요, 그러니까."

"사진을 잘 찍고 못 찍고가 그렇게 중요한 지 몰랐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네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네, 내가 왜 거기 그렇게 집착을 했지? 물끄러미 닿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네가 뒤로 돌았다. 다음 꺼 봅시다. 앞서 걷는 네 뒷모습이 혼자 보기 아까워, 나는 얼른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마음에도 담고, 기록으로도 남겨야지.

 

아무튼 함께 있으면 지루한 줄을 몰랐다. 사람이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는지. 재채기만 한번 해도 일주일 내내 그 귀여운 재채기가 생각나 웃을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재미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스물 다섯이 넘어간 이후로 뭔가가 궁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너는 보물섬 같아서, 무엇이 숨겨져 있는 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오늘도 하나 알았다. 사진은 못 찍는구나. 그 순간 네가 뒤로 돌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금새 브이를 그리며 포즈를 취하는 네가 보였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못 찍지만, 찍히는 건 좋아하네.  카메라 너머의 네 얼굴처럼 나도 웃었다.

 

 

 

 

2018.08.25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레이션에는 긴장도 두려움도 동정심도 없었다. TV 화면 속의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그 뒤의 트럭에서는 비닐 앞치마를 입은 남자들이 손에 바리깡을 든 채 내리고 있었다. 바뀐 화면에서 바리깡을 든 남자의 손은 무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양들의 살점을 함께 깎아냅니다. 영상과 달리 나레이션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에어컨을 켠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는 나의 TV에는 동물 복지를 다룬 다큐가 나오고 있었다. 털과 함께 가슴살이 뜯기는 거위,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너구리,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가는 토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뿐이었다. 양의 비명소리가 나오는 TV를 켜둔 채 냉장고로 간 나는 아이스크림과 스푼을 들고 돌아와 TV 화면을 돌렸다. 뭔갈 먹을 때 보고 싶은 영상은 아니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 후엔 이런 생각을 했다. 타인의 고통이란 이런거지.

 

 아마 그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얘기해봤자 내 고통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린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다 만나서, 어쩌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쩌다 친밀한 사이가 되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우리가 싸우지 않는 대화는 점심 식사 메뉴나 오늘의 코디에 어울리는 신발을 고르는 것 정도였다. 혹은 누구 하나가 양보하여 함께 영화를 볼 때 라던지.

 

 그 사람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고 고쳐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날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충분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것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내 고통을 그 사람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주길 바랐다. 나도 모르는 내 감정의 원인을 찾아 말로 정리해주기를 바랐다. 나도 그러지 못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더 힘들어져갔고, 휴대폰에서 서로의 이름을 지우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뚜껑을 덮고 다시 채널을 돌리자 이불과 옷의 장식용 털과 키링이 된 거위, 너구리, 토끼, 양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단체의 대표가 참여와 협조를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한 사람분의 데이터가 지워진 폰을 들어 공손히 모으고 있는 대표의 손 옆에서 반짝이는 후원 전화번호를 눌렀다.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건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전화 한 통 정도라는 사실에 자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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