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스물 일고여덟 정도이고 앞서 받았던 인상보다 더 얼굴이 하얘서 역시 미남이구나 생각했어요. 근데 미남이면 뭐 하나요, 제가 그 자식 얼굴 뜯어먹으며 일할 것도 아니구요.”



후배의 맥주 오백 잔이 금새 바닥을 보였다. 빈 잔을 허공에 들고 흔드는 후배를 본 알바생이 후다닥 달려와 그 잔을 가져갔고 후배는 빈 주먹을 테이블 위로 내려쳤다. 치킨 뼈를 바를 때 썼던 포크가 그릇과 부딪쳐 덜그덕 소리를 냈다.



“아니 글쎄, 팀장이랑 상무랑 와가지고 막 잘생긴 부사수 붙여줘서 자기들한테 고맙지 않냐는 거 있죠? 돌았나 진짜.”



어찌나 씩씩대며 열변을 토하는 지 귀 뒤에 야무지게 꽂아주었던 칼 단발이 쏟아졌다. 얼굴을 반쯤 가린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손바닥으로 치워버린 후배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윙크를 하듯 왼쪽 눈만 느리게 깜빡 거리는 얼굴. 머리 꼭대기까지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손바닥으로 밀어버린 머리카락은 금새 다시 쏟아져 눈을 가렸다. 고개를 흔들며 머리카락을 치워보려고 애쓰는 주정뱅이를 대신해 귀에 머리를 넘겨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가 밝아져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니면 내가 자신의 말에 동의해주기를 기다렸던 모양인지 알 수 없었지만 후배가 다시 모터를 단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막 꽃 같은 후배 들어와서 너무 부럽다면서. 난 니들이 더 부럽다 이 새끼들아. 적게 일하고 많이 벌고. 솔직히 후배 가르치는 거 귀찮잖아요.”



알바가 새로 채워온 오백잔을 빼앗듯이 손에 쥔 후배가 금새 또 잔을 비웠다. 자꾸 소매로 입을 닦아 버릇해서 셔츠 소매에 립스틱 자국이 가득했다. 코로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에 턱을 괸 나를 보던 후배가 웃었다.



“언니, 나 취했나바.”

“…갑자기?”

“응. 언니 앞에 잔 두 개가 네개로 보여요.”



아하하하하하! 후배가 박수를 치며 웃더니 화장실을 가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휘청 할 것 같아서 아까 신발을 바꿔 신은 참이었다. 여의도로 출퇴근 하는 커리어우먼 같은 셔츠와 치마 밑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아디다스 운동화가 보였다. 저걸 신고 발목이 꺾여 바닥에 구르지는 않지 싶었다. 평소라면 따라 일어났을 테지만 오늘은 그냥 후배를 혼자 보냈다. 후배가 밀고 나간 문이 닫히자마자 휴대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이미 손가락이 액정을 밀어 전화를 받고 있었다.



“여보세요?”

[ 선배! 시끄럽네. 아직 있어요? 처음 거기? ]

“응, 아직 처음 거기.”

[ 오래도 있네. 엄청 씩씩거리더니… 장난 아니게 들이붓고 있나 보네. ]

“내 앞에 잔 두 개가 네 개로 보인데.”

[ 많이 마셨네. ]

“많이 마셨지… 잔은 사실 하나거든.”



주위가 시끄러워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수화기를 귀 가까이 붙이면서 소리를 키웠다. 낮은 목소리가 껄껄 웃는 걸 좋아했는데 제대로 들리지 않아 아쉬웠다.



[ 저 지금 야근 마쳤는데. 지금이라도 갈까요? ]

“오지마. 이제 파할거니까.”

[ 진짜? ]

“진짜.”

[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구요. ]

“오냐.”



전화는 금새 끊어졌다. 






나이는 스물일고여덟 정도이고 앞서 받았던 인상보다 더 얼굴이 하얘서 역시 미남이구나 생각했어요.”

 

그 말을 하는 S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서 나는 궁금해졌다. 말 한 마디 제대로 나누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호감을 가질 수 있을까?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푸는 것이 어려운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번엔 제가 주문을 받아서 목소리를 제대로 들었거든요? 어쩜 목소리도 제 스타일인 거 있죠. 운명인가봐요.”

양손으로 제 볼을 감싸며 웃는 S는 벌써 사랑에 빠진 듯 예뻤다. 그래서 번호는 물어봤어요? 라는 내 질문에 금방 시무룩해지며 아뇨, 어젠 얼굴보느라 놀라서 어버버 했어요. 다음에 오면 꼭 물어봐야죠!” 하는 모습도 솔직해서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라고 물어보려는데 딸랑, 종소리가 울렸다. “앗 손님왔다. 저 일하러 갈게요 작가님! 제 얘기 들어줘서 감사해요!” 밝은 미소와 함께 어서오세요! 하고 뛰어가는 S의 뒷모습을 보며 S와 이름 모를 그와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앞에 위치한 작은 카페인 이곳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좋은 큰 창이 있다. 지난 연말 두 번째 책을 출간하고 잠시간의 휴식기간 겸 다음 원고를 준비하기 위해 나는 매일 이 곳에 와 짧은 글을 한꼭지씩 쓰고 있는 중이다. 다음 책에 도움이 될지 안될지 모르는 나의 글은 하루에 한 사람씩 지나가는 사람을 골라 그 사람의 인생에 대한 내 나름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으로, 지금까지 52개의 짧은 이야기를 적어냈다. 매일 이곳에 와 2-3시간씩 앉아있다보니 오전 타임 알바생인 S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S의 연애상담도 들어주게 되었다. 일주일 전 (S의 말을 빌리자면)운명처럼 나타난 잘생긴 손님에게 첫눈에 반한 S의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사실 그 남자와 S사이에 일어난 에피소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저 이야기를 하며 얼굴을 붉히는 S를 보는 것만으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를 언젠가 써먹을 수 있지도 않을까 했고.

 

이십대 초반인 S를 보고 있자면 내 옛날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것은 옛날 그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쳐준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우아하지만 날렵한 그 곡선들은 어머니의 성품을 똑 닮았다. 고요하지만 성격이 급한 분이셨지. 그는 생각하며 수첩을 덮었다. 더 읽어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그는 온종일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라 어지러운 참이었다. 가장 마지막 기억은 몇 년 만에 삭발하고 나타난 그의 머리를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쓸어넘기던 어머니의 손길이다. 하나도 놀라지 않은 얼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 건 오히려 그 자신이었다. 전부 알고 계셨구나. 철자를 틀릴 때마다 찰싹찰싹 등을 때리던 그 손으로 이제는 당신보다 키가 더 커버린 자식의 민머리를 쓰다듬던 어머니. 굳이 안 도망갔어도 될 걸 그랬다.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어머니는 그때 작게 웃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짧은 재회가 지나갔고, 쇠약해져 누운 것은 어머니였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병원 복도에서 몇 번이나 주저앉은 것은 그였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전보를 받았고, 며칠을 달려 만난 어머니의 육신은 마침내 급하게 마음을 먹을 일이 없는 곳에 누워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남겨진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가져가라며 떠맡은 상자에는 몇십 년 분량은 족히 될 수첩들이 있었다. 가죽 노트부터 판촉물용 메모지까지, 어마어마한 양을, 똑같은 필적으로 채운 어머니. 무엇이 중요한지 구별해 내기에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 자신에게 버려지듯 넘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네 번째 상자를 뜯어보고 있었다. 생전의 어머니는 대체 어떤 일상을 지냈기에 이렇게 믿을 수 없이 많은 글을 남겼을까? 이 글은 다 무엇일까? 기상 예보가 적힌 페이지 뒤에는 오늘의 장 볼거리가 적혀 있고, 받는 사람이 계속 바뀌는 편지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의 일기, 백과사전에서 무작위로 베껴온 듯한 빽빽한 설명. 어머니에게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던 걸까? 일주일을 꼬박 매달렸지만, 어머니의 필기는 끝이 없었고, 이제 그가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어둠 속으로는 어머니의 필적이 둥둥 떠올랐다. 


그렇게나 많은 글을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에 관한 내용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전날 삶았던 감자가 유난히 물렀다거나, 볼리비아의 우기에 대한 기록은 있었지만, 어머니가 혼자 낳아 몇 년간 길러낸 그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픈 걸까? 머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뎅강 잘라버리고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무서워 다락에 숨던 날을 회상했다. 쿰쿰한 먼지 냄새를 맡다 보니 혼나면 어쩌지 하며 졸이던 마음이, 꾸짖어도 좋으니 나를 찾아내라고, 나를 보고 화를 내 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으로 바뀌었다. 어머니는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면서도 찾지 않았었다. 머리칼을 뭉텅이 그대로 다락에 버려두고 겨우 기어 나왔었지. 그 날 저녁에도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에게 글씨 쓰기를 가르쳐 주셨다. 마지막 날 몰래 들른 다락방에는 그 뭉텅이가 그대로 있었다. 그 뭉텅이만큼의 머리가 또 한 번 자라는 동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아니, 나는 조금도 슬프지 않아. 

2018.09.16



그 것은 옛날 그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쳐준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모난 곳 없이 꺾은 선들과 일그러진 곳 하나 없는 정확한 동그라미. 그가 편지 봉투에 정갈히 수 놓인 글씨의 주인을 알아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책상 서랍에 손을 넣어 편지들을 그러모아 쥐었다. 꼭꼭 봉인된 어머니가 적은 수많은 편지가 두 손 가득히 잡혔다. 


동네의 서신이란 서신은 모두 도맡아 적어주던 어머니였다. 자네 필체가 고우니 대신 좀 적어주소. 어머니는 항상 예예, 웃으며 대필을 해주었다. 하지만 대필을 끝내고 나서는 그에게 속마음을 말하곤 했다. 사실 어머니는 대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글씨를 쓸 때마다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그렇다고 했다. 엄한 사람이었다고 들었다. 계집애가 글은 배워 무엇하느냐. 글짓기 하여 무엇에 쓸테냐? 정 글이 배우고 싶거든 글씨를 정갈히 쓰거라. 삐뚠 획에 손등 회초리 한 대. 아래로 기울어지는 문장에 종아리 한 대. 그리 배운 글씨였다. 어머니는 그리 배운 글씨로, 제 글은 못 쓰고 다른 사람 편지만 대필하다가 가셨다.


그런 줄만 알았다. 그는 손에 쥔 봉투를 하나하나 넘겨보았다. 사랑하는 우리 아이에게. 사랑하는 어머니께. 아버지께. 그리운 우리 언니야. 어머니가 그 예쁜 글씨로 한자 한자 눌러 담은 마음이 서랍 속에 가득했다. 대필한 편지들은 다 우표 날개를 달고 멀리 멀리 닿았는데. 어머니의 마음은 이 서랍 속에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구나.




한니발 (NBC, 2013-2015)

한니발 렉터 X 윌 그레이엄

Keyword

'대가', '볕', '첫'

뱀파이어 선생님 X 미신을 믿지 않는 학생



*


크로포드 교수의 자살은 생각보다 시설을 뒤집어 놓지는 않았다. 몇 달 전부터 헛것이 보인다며 새벽 시간에도 학생 기숙사동까지 내려와 난리를 치던 그였다. 뿔 달린 사슴이, 불에 타고 있는 나무가, 버섯이 돋아나는 피부를 가진 학생들이… 가뜩이나 흉흉한 때에 그런 형상을 본다고 말하고 다녀봤자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모두 아침 식사를 무난하게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참이었다. 


“크로포드는 미래를 보는 쪽도 아니었잖아.” 알란 블룸이 무심하게 말했다. 


“장례는 없겠지?” 마치 ‘다음 수업은 경전 풀이 시간이지?’ 라고 말하듯 평이한 말투로 그가 덧붙였다. 당연한 소리. 윌 그레이엄은 멀건 죽을 한 스푼 크게 뜨며 대꾸를 대신했다. 





_

“가을이 오긴 하나 봐, 해가 짧아지네.” 알란이 복도의 아치형 창가에 기대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래서? 윌. 다시 해가 길어질 계절이 되면 우리는 밖으로 나가야 해.” 알란은 ‘졸업’이라는 단어를 꺼리곤 했다. 윌은 그보다 더 필사적으로 진로에 관한 이야기를 피했고. 알란은 딱히 윌이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봐, 너도 크로포드 밑에서 무사히 끝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 맞는 말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는 ‘멘토’였다. 불같은 성격에, 사람을 몰아붙이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기도 했다. 그렇지만 윌은 크로포드가 이상증세를 보이고 나서부터 어느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단 사실이 기분이 한없이 불쾌했다. 뒤집히는 계절보다 사람들의 냉정함이 더 소름 끼쳤다. 




반세기 만에 찾아온다는 겨울은 유독 지독할 예정인지, 해가 짧아지고 이슬 대신 서리가 내리는 날이 오면서부터 사람들이 한둘 죽기 시작했다. 몇 달 전에는 종류를 알 수 없는 짐승에 당한 듯 전신에 피를 모두 잃고 사체들이 발견되더니, 요즘은 자살자가 대부분이었다. 평생 처음 겪어보는 겨울의 전조라지만, 윌은 아직 오지도 않은 안갯속을 걷는 듯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한니발에게 부탁하는 건 어떨까?” 멍해진 윌의 표정을 살피던 알란이 불쑥 말했다. 


“한니발?” 


“렉터 교수님 말이야.” 


“그러니까. 넌 ‘한니발’이라고 불러?” 


“그건, 그냥… 부모님을 통해서 알던 사이뿐이야.” 그답지 않은 말투였다. 눈도 귀도 막고 살고 싶은 윌이었지만 알란의 일이니 모른 척할 순 없었다. 


“알란, 그 사람은… 네 나이의 몇 배는 될걸. 게다가…”


“바보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당황해서 눈이 커진 알란의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이번에 시선을 피하는 사람 또한 알란 쪽이었다. 


“’그런’ 마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됐어, 그만 얘기하자. 그냥 이런 시기에 새로 멘티를 받아줄 만한 교수는 그 사람뿐일 것 같아서 꺼낸 말이었어.” 




윌은 더 캐묻기를 관두고 탑 뒤 쪽으로 이어지는 공터로 시선을 돌렸다. 관리인들 네다섯 명이 큰 포댓자루 같은 것을 힘들여 옮기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지만, 꼭, 여기까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알란의 말이 맞겠지. 그는 대부분 문제에 옳은 답을 제시했다. 밤이 더 길어지기 전에 졸업에 대해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윌은 부은 눈가를 꾹꾹 눌렀다. “렉터 교수, 침탑 쪽 별관에 머물던가?”





__

윌리엄 그레이엄. 


흔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는 어린 시절. 부모 중 한 사람의 꾸준한 부재 (아마도 어머니일 것이다) 와 잦은 이사. 아주 어릴 때부터 시설에 들어오는 아이들과는 달리 청소년기가 다 지날 무렵에 이 곳으로 온 학생. 나이에 비해 푸석한 모발, 늘 튼 눈가와 입술. 고질적으로 불면이 있었고 가장 간단한 수준의 영양소 섭취에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복도에서 가끔 손을 떨거나 넘어지면 그와 친한 유일한 학생인 알란 블룸이 부엌에서 챙겨 둔 퀴퀴한 비스킷을 쥐여 주곤 했다. 시선을 거의 마주하지 않았고 질문을 받았을 때는 말을 더듬거나 너무 장황하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은 아닌 듯했다. 대화를 시작한 사람을 당황하게, 혹은 불쾌하게 만들려는 듯 보였다. 그 나름의 거리 두기 기술일 것이었다. 벽을 견고히 쌓아 결국은 투명해지기를 택하는 그 방식이 렉터의 눈에 띄었다. 




[H. 렉터 교수님께,

찾아뵙고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졸업 의례에 관해서 

W. 그레이엄]




공손한 첫 문장의 글씨에 비해 두 번째 문장은 쪽지를 부치기 직전 서명 위에 끼워 넣은 듯 비뚤어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종이의 접힌 면에 비밀을 급하게 털어놓듯 ‘괜찮으시다면’하고 휘갈겨 쓴 그의 필체. 렉터가 누군가에게 이런 태도의 서신을 받는 일은 드물었다. 편지지도 아니고 손바닥만 한 빈 종이며… 평소라면 그 무례함에 불쾌해졌겠지만, 그레이엄의 세 가지 필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메모가 퍽 맘에 들었다. 윌 그레이엄은 공개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거나 미움받는 인물도 아니었지만, 높은 성적에 반비례하는 사회성 탓에 인기가 있는 편도 아니었다. 아주 작은 소문 하나만 따라붙어도 넘치는 적을 만들게 될 것이고, 해명도 변명도 하지 않을 그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그레이엄을 고립시키는 일은 일도 아니었다. 렉터는 다시 쪽지의 필체를 관찰하며 생각했다. 굳이 그럴 필요조차 없을지도. 




그는 이내 윌의 쪽지가 전달된 모양 그대로 다시 접어 서랍에 넣으며 붉은 깃털로 장식된 펜을 책상에서 치웠다. 윌이 혹시라도 부담스러워하지 않기를. 책꽂이에 놓아둔 작은 액자 또한 덮어두려 멈췄다. 방문 앞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L자 모양으로 휜 별실 안으로 들어와 책상 앞에 마주 앉으면 시선을 뗄 수 없을 액자는 찬란하고 어지러운 색채의 그림을 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거인이 무언가를 쥐고 있는 그림이었는데, 렉터는 그림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비웃음을 닮은 미소가 얼굴에 떠오르는 탓에 잠시 입가에 힘을 줘야 했다. 




그때였다. 노크 세 번. 예상한 것보다 무게가 있다. 


“들어오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윌 그레이엄이 별실로 들어왔다. 10분 전부터 문 너머로 서성이던 그의 병든 체취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크로포드 교수에 관해서는 유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만나서 반갑다고 시작하던데요.”


“우리 둘은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군요.”


그레이엄은 그 말에 렉터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마치 그 사실을 지적받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고 잔뜩 엉킨 앞머리를 이마로 쏟아 내렸다. 


“듣자하니 예지력이나 독심술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레이엄 군. 혹은 둘 다요. 생전의 크로포드 교수도 그레이엄 군을 자주 칭찬했어요.”


“벌써 생전이라고 하시네요. 오늘 아침에 발견되셨는데.”


“어느 정도는 예견된 일이었죠. 그레이엄 군은 그 미래를 보지 않았습니까?”


“저는 미래를 볼 줄 아는 게 아닙니다. 그저… 설명해 드려도 잘 이해가 안 될 거 에요.” 


“해보세요.”




Try me. Me를 발음하는 렉터의 입술이 아주 빨리 열렸다가 얇게 다물렸다. 새로 온 초빙교수라며 단상 앞에 섰을 때부터 느꼈지만, 렉터 교수는 말을 할 때 이가 거의 보이지 않게 구강구조를 움직였고 정확히 그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발성했다. 혹시 아주 추한 치아를 가진 걸까? 그의 생각이 딴 곳으로 흘러가는 걸 읽기라도 한 듯 렉터 교수가 보란 듯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윌은 말 돌리기를 포기하고 한참 전에 렉터가 앉으라며 손짓했던 나무 의자에 앉아 그를 마주했다.




“저는 그냥 행동 속에서 패턴을 보는 것뿐입니다. 흘려 보아도 좋을 것들을 좀 더 잘 기억하고… 사람들은 의외로 예측할 수 있거든요. 특히 이곳의 사람들은 비밀을 만들기가 어렵고 패턴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는 법이 거의 없으니까요. 마음이나 생각을 읽는 게 아니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 말하지 않는 것, 그들의 몸이 말하는 것 등을 지켜보면 그냥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뿐이고요. 크로포드 교수님이 유난히 치켜세워주시긴 했지만. 정말로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닙니다.” 




렉터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찰나였지만 윌은 그의 도드라진 송곳니를 놓치지 않았다. 추한 광경은 아니지만, 확실히 감추고 싶을 수도 있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렉터가 말했다. 




“이렇게 힘차게 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뭐… 제가 열정을 가진 부분이니까요.” 쭈뼛대는 그레이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렉터가 어느새 다 우려져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차를 따랐다. 


“열정은 좋은 것이죠. 피도 잘 돌게 해주고.” 


“피요?” 의학을 전공하면 저렇게 생각하게 되는 건가? 


“피를 달빛 아래에서 본 적 있나요, 윌? 아주 까맣게 보이지요.” 




윌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렉터가 건네준 찻잔을 들고 최대한 티 나지 않게 별실을 관찰했다. 렉터의 의도대로 윌은 몇 번이나 작은 액자를 훔쳐봤다.




“저 그림이 마음에 드나요?”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마음에 드는지 아닌지 잘… 삽화는 아닌 것 같은데요.”


“신을 묘사한 것이랍니다. 먼 이국의 신 중 가장 아버지 되는 신이었지요.” 거기까지만 말한 렉터가 서성임을 멈추고 의자에 앉았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졸업에 관해 이야기해볼까요?”




그 대신 윌은 저 아버지 신이 누구인지 묻고 싶어졌다. 어째서 저런 흉측한 모습으로 무언가를 뜯어먹고 있는 건지, 어째서 저런 눈에 띄고 천박한 색을 입혔는지, 언급한 이국은 어디이며 대체 신을 기리는 그림을 저렇게 그리는 곳은 어디인지, 렉터 당신은 그곳에 가본 적 있는지… 


“이교도의 우상화를 시설에 가져와도 되나요?” 대신 터져 나온 질문은 이것이었다. 윌은 멋쩍은 기분이 들어 손등을 조금 긁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윌?” 윌은 꾸중이라도 들은 듯 어깨를 움츠렸다. 렉터는 전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미롭게 눈을 빛낼 뿐이었다. 


“그래서, 제가 윌의 교수가 돼서 졸업 의례까지 함께 한다면 그 대가로 저는 무엇을 얻게 되나요?”


“대가요?” 윌은 순간 렉터가 금전을 요구하는 것인지 헷갈렸다. 돈이라고는 수중에 없었고 있어 본 적도 없다. 렉터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저는 드릴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데요…” 이렇게 노골적으로 뭔가 요구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잔뜩 움츠러든 윌의 어깨를 눈치챈 렉터가 느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질적인 걸 부탁하는 건 아닙니다. 제 식사를 돕는 건 어떨까요, 윌?” 아마 렉터에게는 저 표정이, 최선을 다한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 인 거겠지. 정교하게 만들어진 해부모형을 볼 때와 비슷한 미묘한 불쾌함을 떨치려고 윌은 또 한 번 시선을 피했다. 


“급식소나 식당에서는 뵌 적이 없는데, 그건 식사할 때 도움이 필요하셔서 그랬던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아주 까다로운 식단을 지켜야 하거든요. 일종의… 지병이라고 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지병이 있다는 남자의 식사를 돕는 것으로 무사히 졸업할 수 있다면 윌에게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군다나 렉터는 친절하고 교양 있어 보였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몇 달 내로 자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천천히 대답했으면 좋았을 걸, 윌은 왼손이 계속 조금씩 경련 중이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자세한 건 차차 말씀 주시겠죠.”


렉터가 아주 조그맣게 ‘물론이죠’ 라고 말하며 두 사람 앞에 놓인 다기를 치우자 멀리서 종이 울렸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윌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필체만큼이나 성의 없는 인사를 웅얼거리고는 별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렉터가 권한 차의 신맛이 입에 남아 텁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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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과 졸업을 준비하는 일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윌 그레이엄의 삶에서 가장 순조로운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몇몇 아이들은 체구가 좋다는 죄로 공터에 모여 해가 떠오르기도 전에 일어나 장작을 팼고 더 어린아이들은 땔감의 개수를 센 뒤 헛간으로 날랐다. 잠이 별로 없다는 이유로 렉터 교수는 그 일과를 관리하기로 지원했고 (‘새벽에는 피가 잘 돌지요.’ 같은 말 따위를 하며), 그가 뿌연 안경을 쓰고 아이들이 부르는 숫자를 괴상한 펜으로 종이에 적거나, 꾸물거리는 아이들을 조용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재촉하는 내내, 윌은 비루한 등불을 들고 곁을 지켰다. 렉터가 굳이 따라 나오라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윌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기분을 받았다. 게다가 식사 시중을 들어주는 대가로 자신의 졸업 의례를 담당해주겠다고 한 렉터는 아직 윌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렉터는 여태 윌이 쓴 모든 관찰록이나 경전해석에 색깔별로 주석을 달아 조언을 주고, 화학 시험 때 쓸 계량법을 ‘조금 쉽게’ 고쳐 주기까지 했다. 역사 과목 대신 윌이 열정을 보인 ‘행동 관찰’에 대해 졸업 논문을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제시한 것 또한 그였다.




조바심이 난 윌은 알란에게 ‘대가’에 관해 물었다. 알란은 ‘식사 시중’이라는 개념에 몹시 혼란스러워했고 그게 완곡한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식사 시중이라는 걸 몇 번이나 윌이 강조하고 나자 조금 재미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겠어. 일단 그 시중을 들던 사람은 내가 아니야.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그가 뭘 먹는 모습을 본 적은 좀처럼 없지만… 농담이었던 거 아니야?” 그러면 어디까지가 농담이었던 거지? 윌은 저울대를 흔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날의 대화를 복기했다. 자꾸 떨리는 왼손 때문에 어느 쪽도 집중하기 힘들었지만. 






처음 겪는 겨울도 한번 추위를 맛보고 나니 두려워하던 것보다 나쁘지 않았다. 처음 해보는 난방 준비나 털실로 옷 만들기, 처음 입어보는 두꺼운 모자, 목도리 등에 신난 학생들 덕분에 시설은 오히려 더 쾌활해졌다. 양초가 소비되는 속도가 예상 밖이라 알란을 포함한 몇몇 학생들과 칠튼 교수가 시장까지 다녀오는 일도 있었다. 알란을 비롯해 거의 평생을 시설에서 산 학생들과, 마지막으로 밖으로 나가 본 일이 까마득한 교수진들에게도 이 사안의 심각성보다 상황의 새로움이 더 흥분되는 일이었다. 새벽의 땔감 준비조도 이제 해가 너무 짧아진 탓에 모일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 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한동안 어슴푸레한 헛간 앞에서 렉터 교수를 보는 것으로 매일 하루를 시작하다가, 불쑥 루틴이 깨지니 어색했다.




어색함을 잘 버티는 사람이었다. 윌 그레이엄은. 대부분은 말이다. 

스스로 적응력도 뛰어나고 남의 일에는 오지랖 부리지 않고도 적당히 필요한 정보만 취할 줄 안다고 자신했다. 그런 윌은 지금 가지고 있는 옷 중 가장 두꺼운 옷을 입고 몇 남지 않은 긴 양초를 등 안에 넣고 학생 기숙사가 있는 탑을 빠져나와 헛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도 달이 무겁게 하늘에 걸려 있었지만, 곧 시설의 일상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지금 윌이 시려오는 발을 끌고 스스로를 재촉하는 원동력은 호기심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기억할 수 있는 한 처음 타인에게 갖는 호기심. 언제부턴가 떨림이 멈추지 않는 왼손으로 든 등불보다 더 밝은 건 시커먼 밤하늘의 보름달이었다. 첨탑 끝에 닿아 있는 달이 기괴할 정도로 크고 밝아 보였다. 그 아버지 신의 미친 눈동자처럼. 윌은 자꾸 구역질이 나고 피 냄새가 나는 듯해 마른 입안을 씹으며 걸었다. 이내 익숙한 헛간이 어둠과 안개에 섞여 옅게 보였고, 렉터임이 틀림없는 실루엣이 눈에 들어오자 윌은 숨을 멈췄다. 친절한 멘토의 품에는 축 늘어진 몸의 어린 학생이 있었다. 윌의 방향에서 렉터가 등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프랭클린. 나이에 비해 응석쟁이에 짜증이 많던 그 아이도 얼마 전까지 같이 땔감을 준비하던 학생이었다. 추운 공기 탓에 프랭클린의 목덜미에서 김이 나고 있어서, 이 각도에서 보니 꼭 렉터가 화학 반응을 일으키는 그릇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렉터는 그 생각을 듣기라도 했는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이 액체는 체온과 비슷한 온도에서 보관하는 게 좋습니다.’ 라고 설명이라도 할 것처럼 평소 같은 얼굴이었다. 프랭클린은 잠옷에 피 몇 방울이 묻은 것 외에는 놀랍도록 평온히 잠든 모습이었다. 못 본 척하려면 늦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윌은 등불을 좀 더 들어 자신의 얼굴을 보였다. 귓가에 자신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신을 믿나요, 윌?”


“위험한 질문을 하시네요.”


“교실 밖인데도요?”


“어디에 있더라도요.”




렉터는 조용히 프랭클린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아이의 몸이 땅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윌은 귓속에 울리던 박동 소리가 프랭클린의 심장임을 깨달았다. 자신의 심장은 여느 때처럼 평온히 뛰고 있었다. 




“저도 죽일 건가요?”


“글쎄요, 윌.” 짐짓 심각하게 고민해보겠다는 듯 미간에 힘을 준 렉터는 기이하게도 처음 별실에서 보았을 때 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제가 올 걸 알고 계셨군요.”


“윌은 아직 모르겠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이 새로운 일을 하려고 마음먹으면 정말 독특한 냄새가 난답니다.”


“지금, 저한테 냄새가 난다는 건가요?”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하겠냐만은. 윌은 순간 얼굴에 불이 끼얹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렉터는 그 질문에 소리 내서 웃었다. 아주 짧은 웃음이었지만 그놈의 송곳니가 검은 입속에서 달빛을 받아 또렷이 보였다. 윌은 이제 알 수 있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저 송곳니가, 늘 들릴 듯 말 듯한 웃음소리가, 친절한 듯 무자비한 눈빛이 모두 그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세상 자체에서 냄새가 난답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제게 대가를 치르게 할 건가요?” 


물어 놓고 대답을 듣지 않는 버릇이 있군. 렉터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윌. 애벌레에게 볕과 먹이를 주고 고치 너머로 속삭일 수는 있지만, 거기서 어떤 본성을 가진 존재가 나올지는 제가 절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렉터의 시선이 첨탑의 반대편에서 일출의 기미를 찾았다. 공기 온도가 바뀌고 있었다. 곧 종이 치고 하루가 시작될 것이었다. 윌은 황야가 된 땅에 나뒹구는 프랭클린의 담요를 집어 들고 렉터 쪽으로 거리를 좁혔다. 




“교수님 말이 맞았군요.” 윌이 렉터의 입가에 옅게 묻은 피를 손으로 닦아냈다. 정말 달빛 아래에서는 새까맣네요. 고치 밖으로 나온 덕인지 손이 더는 떨리지 않았다.





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 비대칭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나, 사람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정교한 조각품인 알라이드의 경우 완벽한 대칭으로 사람의 눈을 홀리게 한다.

오늘도 아름다운 알라이드.

사람들은 너도나도 알라이드의 외형을 칭송했다. 하지만 칼란은 자신이 만든 알라이드를 볼 때마다 자신의 강박증을 저주한다.

알렉스를 떠올리며 만든 알라이드. 그의 팔, 다리, , , , 모두 똑같이 만들고 싶었는데..

다른 모양의 속쌍커풀이 있는 눈, 한쪽만 올라간 입꼬리, 살짝 휜 콧대, 한쪽으로만 뻗치는 머리칼, 크기가 다른 손, 분명 이런 것을 떠올리며 하나하나 만들었는데..

조금씩 조금씩 깎아 내다보니 알렉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익숙한 듯 낯선 모습으로 남겨진 알라이드.


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대칭에 매력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칭은 건강을 암시하고, 나아가 완전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미지와 조우한 인간은 그 대상에 서사를 부여하기 마련이다. 아주 먼 옛날부터 이해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질병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사연을 붙여주던 그 고대의 습관은 수 만년을 지나고도 우리 안에 살아남았다. 그렇게 알라이드가 경배와 혐오의 대상이 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스코틀랜드의 평지에서 처음 발견된 알라이드는 어떤 목적도 갖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최초 발견자인 매카보이씨는 그저 오로라가 뜨는 방향을 향해 세워진 설치 미술인줄 알았다고 전했다. 처음 발견될 당시의 알라이드는 그저 거대한 구체였다. 빛을 흡수하는 재질로 코팅이 되어 멀리서 보면 마치 땅에 구멍이 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대한 구체. 사람들이 왔다 갈수록 그 모양은 점점 변했다. 하나였던 구체는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났고 모양 또한 변해갔다. 어두운 구체The Dark Orb라고 불리던 그들은 검은 눈사람The Black Snowman이었다가 이내 얼굴 없는 사람들The Faceless People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날이 갈수록 아주 조금씩 인간과 비슷하게 변해가는 얼굴 없는 그들. 이전에도 외계의 침략을 겪고 친교한 경험도 있는 지구였지만, 이렇게 방문 의도는커녕 방문 경황도 밝히지 않은 존재는 처음이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을 연구하기 위한 캠프가 세워지고 허물어진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시간이 지나도 뚜렷한 성과가 없자 사람들은 아마 정신 나간 예술가의 장난일 것이라거나 더 큰 이슈를 덮기 위한 눈 가림막이라고 얘기했다. 그렇게 또 자연스레 서서히 대중들이 얼굴 없는 그들을 까먹을 무렵, 그들이 살아났다. 살아났다고 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있다. 그들은 구체일 때부터 살아있었으니까. 처음으로 진행된 대화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지구인으로서는 정당한 질문이었다.

-       우리는 멀리서 왔습니다. 아직 당신들이 이해하기 힘든 개념을 가진 곳에서 이해하기 힘든 방식으로. 그러나 두려워 말라. 우리는 동맹The Allied이다.

지구인들은 알라이드를 믿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다소 힘 빠지는 태도로 그들의 정착을 허락한 이유의 20% 정도는 그들의 아름다움 때문일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렇게 또 새 이름을 얻은 그들은, 물리적으로는 어떤 한가지 정해진 형태가 없었지만 보는 사람의 의식에 따라 겉모습을 조절했다. 목격한 사람들이 말하는 공통점은 단 두 가지였다. 암흑과 같은 피부와, 이질적이고 완벽한 대칭

프리스비는 재빨리 그녀가 찾는 병을 건네준다. 프리스비가 그녀와 함께 이 일을 한지도 어느새 몇 년이나 됐다. 몇 번이나 겨울이 지나고 수백 번의 호통과 냉소를 버텨낸 프리스비는 어느새 그녀가 입을 떼기 전 짓는 미세한 표정으로 다음에 그녀가 뭘 말할지 알아맞히는 경지에 다다랐다그녀가 병을 기울여 바닥에 누운 남자의 입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죽은 지 오래인 듯 추운 공기에서도 퀘퀘한 냄새가 났다. 게다가 그녀가 아끼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덮어놓은 걸 보니 아무리 이름난 해결사인 그녀에게도 보기 불편한 죽음이 있는 모양이다. 프리스비는 양손을 얌전히 모으고 그녀가 시체의 -시체가 아니라면 정말 곤란할만한 행색의- 입가에 병에 든 액체를 조금씩 흘려 넣으려는 것을 지켜본다. 그녀는 오늘 밤, 평소와는 다르게 잔뜩 긴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나 중요한 의뢰였던가? 프리스비는 문득 자신이 이번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점이 거의, 아니,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큰일인데. 그녀가 뭐라도 묻기 시작하면 어쩌지? 프리스비는 안절부절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그녀의 표정에 집중했다. 찌푸리거나 무표정인 채로 작업에 임하는 평소와는 달리, 그녀는 절박하고 다급해 보인다. 그러던 그녀가 프리스비에게는 말도 없이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직접 양초에 불을 붙인다.  하며 붙은 성냥불과 순간적으로 밝아진 눈앞에 프리스비는 잠시 얼떨떨하다.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프리스비는 추위에 오그라 붙은 입술을 연다


아가씨, 제게 시키시면 될 일인데…” 


그러나 프리스비가 말하려 했던 문장은 문장이 되지 못한다. 한 손에 양초를 든 그녀가 아주 천천히 시체의 얼굴에 덮여있던 소중한 손수건을 거둔다. 프리스비는 그때, 그제서야 볼 수 있다. 그들의, 아니, 그녀의 이번 의뢰의 주인공은 프리스비 자신이었음을


프리스비, 내가 왔어. 늦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볼에 닿는 그녀의 손은 날씨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따스하고 부드럽다. 이제서야 프리스비는 여태 왜 그녀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지, 왜 자신에게는 이 무덤가에 오기전까지의 기억이 없는지 깨닫는다. 병을 건네준 것은 자신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몸은 이 겨울에도 퀘퀘한 냄새를 내며 딱딱하게 얼어붙은 언덕 위에 뉘여있음을. 양초에 붙은 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아가씨, 저는 이제 어쩌죠?”


녹는다.”

내 말에 제이는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는 메로나를 호르릅 핥았다. 더운데 꼭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해? 땀으로 축축한 등을 식히려고 티셔츠 뒷자락을 펄럭이며 제이를 흘겼다.

좋잖아, 날씨랑 싸우는 기분?”

햇빛이 쨍-하고 내리쬐는 중학교 운동장 철봉 위에서 제이는 또 한 번 녹은 아이스크림을 후르릅 마시고 키키키 하고 웃었다. 제이를 처음 만났을 때 저 웃음소리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키키키. 일부러 하나하나 끊어 내는 듯한 소리.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아빠의 직장따라 이 도시로 이사를 왔고, 2학기가 시작되며 전학한 이 학교에서 제이를 처음 만났다. 태어날 때부터 숫기라곤 없는데다가 깊어진 사춘기에 더욱 소심했던 나는 1학기 동안 이미 무리를 만든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앞에서 네 번째 줄, 복도 창문 사이 좁은 벽 옆의 책상에 앉아 수업 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학급문고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는 것이 일과였다. 그런 나날이 삼 주 쯤 지났을까, 이미 수없이 읽어 책장 사이가 부푼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던 점심시간이었다. 여전히 혼자였던 내 눈 앞에 불쑥 휴대폰 하나가 들어왔다.

우리 집 강아지 사진 볼래?”

하얗고 복슬거리는 털에 초코칩처럼 까만 눈동자가 콕콕 박혀있는 강아지 사진을 내밀며 제이는 말했다.

얘 이름도 해리다? 너 해리 포터 좋아하는 거 같아서 키키키

. ”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겨우 하는 소리를 낸 내 앞자리에 앉은 제이는 제 얘기를 쏟아냈다. 우리 집은 여기서 버스타고 다섯정류장 가야해. 원래 학교랑 가까웠는데 세달 전에 이사갔어. 그래서 전학갈 수도 있었는데 내가 전학가기 싫다고 떼써서 이겼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해서 좀 싫긴한데 그래도 난 우리 학교 운동장이 좋아. 우리집 식구는 일곱이야, 할머니랑 부모님이랑 오빠랑 나랑 강아지 두 마리. 우리 오빠 이름은 아이다? 에이비씨디이에프지에이치아이제이. 키키키. 사실 뻥이야. 오빠 이름은 평범해, 제훈. 우리집 강이지 귀엽지? 얜 해리고 얜 샐리야.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에 나오는 이름이라는데 난 본 적은 없어. 그냥 너한테 말 걸고 싶어서 해리 포터의 해리인 척 했어. 키키키. 근데 넌 해리 포터에서 누가 제일 좋아? 난 사실 해리는 별로고 루핀 교수님이 좋아. 멋지지 않아 늑대인간?

그 때의 나는 응,응 하는 대답만 반복했다. 제이는 생글거리면서도 중간중간 내 표정을 살폈다. 그 눈빛이 고마워서 나는 제이의 표정을 따라 점점 웃었다.

그 후로 오 년동안 우리는 내내 붙어다녔다. 언젠가 제이에게, 왜 삼 주나 지나서 나에게 말을 걸었느냐고 물었을 때 제이는 또 키키키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동안 널 지켜보고 있었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편한 아이라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리고 나랑 잘 지낼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했고, 혹시 사이코패스가 아닌지도 알아봐야했고 키키키. 장난스레 끝난 말이지만 제이스럽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혼자인 나를 신경썼겠지. 궁금증에 급히 다가오기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를 우선해 찬찬히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정도 확신이 생겼을 때 제이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이는 그런 아이였다. 생각없이 밝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생각하는.

 

이거 봐, 개구리 같지? 개굴.”

연두색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쫙 펴며 제이가 말했다. 유독 길고 얇은, 하지만 마디가 도드라지는 제이의 손 끝에 끈적이는 방울이 맺혀있다. 개굴. 혼자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제이가 재밌어서 나도 피식 웃었다.

너 그러다 진짜 개구리 된다.”

싱거운 농담을 했더니 제이는 더 즐거운 표정이 되어서 정말? 그럼 안되지.” 하며 손을 흰 티셔츠에 슥슥 문댄다.

하지만 이미 굳어버린 메로나는 제이의 손과 티셔츠 모두에 달라붙었다. 안되겠다, 개구리 되기 전에 나 얼른 손 씻고 올게. 후다닥 뛰어가던 제이는 장난기가 톡 튀어나왔는지 갑자기 쪼그려앉더니 개구리처럼 폴짝 뛴다. 그리곤 날 돌아보고 개굴하고 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크하하 웃었고 만족한 얼굴로 다시 뛰어가는 제이의 뒷모습에서 키키키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개굴. 제이를 따라 개굴하고 울어 보았다. 개굴 개굴. 두 음절을 입속에서 굴리다 보니 작년 여름 가족여행으로 떠난 지리산 캠핑장에서 들었던 개구리 소리가 떠올랐다. 모두가 잠든 후에 밖으로 나온 나는 캠핑 의자에 누웠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그 여름 바람 끝에 풀냄새가 묻어있는 싱그러운 여름밤의 공기와는 달리, 내 머리는 무거운 안개로 가득 차있었다. 곧 고삼 수험생이 된다는 걱정과 책임없는 십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미지의 이십대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눌렀고 앞으로 뭘 하는 것이 좋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아니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뭘까 하는 고민이 나를 덮었다. 여행자에게는 길잡이별이 있다는데, 나의 길잡이별이 있다면 아주 작은 신호라도 보내주길 바라며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하늘엔 너무나 많은 별이 있어서 어디로 가야할 지는 알 수 없었다.

 

도아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햇빛 아래 제이가 서 있었다. 해가 너무 강해서, 그 아래 있는 제이는 반쯤 투명해 보였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하며 다가오는 제이의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가 물에 젖어있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은 볼과 목을 타고 내려와 티셔츠의 목과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세수 좀 했어. 키키키.

제이야, 넌 뭐하고 살거야?”

철봉 위에 앉아 발을 까닥이며 나는 제이에게 물었다. 까만 운동화에 모래가 묻어 있다.

? 난 맛있는 거 먹고, 자고 싶은만큼 자고, 우리 해리랑 샐리랑 뒹굴거리면서 살지 뭐.”

 아니 그런거 말고.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할지 그런 거말야.”

몰라, 난 그냥 잘 살래.”

난 내가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뭐하고 살지?”

진지하게 내 제일 큰 고민을 이야기하려는데 제이는 듣는지 마는지 그네를 타기 시작한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개학하면 당장 수시원서 써야하는데 큰일이야, 다른 애들은 이미 가고 싶은 학교나 학과를 정했던데. 넌 어디 지원할지 결정했어?

아니 아직. , 네가 보고 싶어하던 영화 어제 개봉했던데 우리 내일 그거 보러 갈래?”

발을 굴러 점점 더 높이 올라가던 제이가 말을 돌린다. 고삼이 된지 오개월이 지났는데 제이와 나는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한 적이 없었다. 어디에서 누군가와 얘기하더라도 빠지지 않는 주제라 제이와 있는 시간동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이야기로도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에게 이 문제는 너무 어려워서 제이와 함께 답을 찾고 싶었다.

내 말 좀 들어봐. 난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니까, 수능도 얼마 안남았는데 그 때까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근데 영화 주인공 진짜 예쁘더라. 이번에 헤어스타일 바꾼 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지? 내일 영화 몇 시에 볼래? 지금 예매할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기 할말만 하던 제이가 발을 뻗어 그네를 멈췄다. 아직 조금씩 흔들리는 그네 위에서 휴대폰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한다. 너 씨지비가 좋아, 롯데시네마가 좋아? 점심 먹고 세시쯤 괜찮지? 자리는 늘 하던 것처럼 젤 뒷자리로 할게. 내일 만나서 밥먹고 영화보고 내가 저번에 가자던 카페 가자. 거기 메론빙수가 맛있대.

영화 예매에만 집중하는 제이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입꼬리에 힘이 들어간다. 혼자 오래 고민하다 꺼낸 말인데 이렇게 무시당하자 나는 내가 줄이 하나 끊어진 그네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됐다. 예매했어. 그런데 너무 덥다아. 나 땀나는 거 봐. 우리 실내로 갈까?”

화가 나서 대답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보는 제이의 시선을 느꼈지만 일부러 무시하며 앉아있던 철봉에서 뛰어내렸다. 분명 굳어있을 내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운동장 바닥을 보며 구겨진 엉덩이를 툭툭 터는데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생겼지? 할 일.”

제이를 보자 반짝, 하고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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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니 삽니다 (ewyn)  (1) 2018.08.10

 

 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그 두개의 탑을 바라보며 저 탑들의 뒷면도 대칭을 이루고 있을까 궁금했다. 칠십여년 전 H의 모국인 RA에 신종바이러스가 나타났고, 섬나라인 RA는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신종바이러슨느 좀비바이러스의 한 종류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바이러스는 두 가지 형태로 발병했다. A형 바이러스는 감염된 순간부터 그 숙주를 좀비로 만들었고 B형 바이러스는 숙주의 생명이 꺼져가는 순간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이 두 바이러스는 같은 유형의 감염자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았지만 다른 유형의 상대에게는 공격성을 보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RA는 두 지역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저 알라이드를 기준으로 A지역과 B지역으로. H는 B지역에 속했다. RA의 B지역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 수 있었다. 그들은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지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다. 가끔 A형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지만 괜찮았다. 갓 태어난 아기는 물어뜯을 이가 없었고 그를 죽이는 방법은 다양했으니까. B형 인간들은 보통의 인간처럼 살다가 어느 나이가 되면 총살 당했다. 노화되어 에너지가 다 사라지기 전에, 그래서 발병하기 전에 죽는 것이 이 지역의 법이었다. 그렇게 B지역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져왔다. 칠십년 전 갈라진 A지역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저 알라이드 근처에서 가끔 총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저곳에도 남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십년 전만해도 저 경계를 넘어가길 원하는 이들이 있었다. 알라이드 사이의 벽이 쌓이기 전 가족과 헤어진 이들이었다. 바이러스의 유형은 무작위로 정해졌다. 그래서 B형 인간들은 A형 가족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숨고, 감싸고, 도망쳤다. 대부분 그 가족에게 물려 죽었지만.

 이제 그 때 가족과 헤어진 이들은 거의 남지 않았다. B형 인강의 수명은 75세까지이기 때문이었다. 남은 건 그 때의 기억이 없는 이들과, 유품으로 남겨진 헤어진 가족의 사진만을 보관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H도 그들 중 하나였다. H의 부모님은 늦은 나이에 H를 낳았고 H가 태어난지 일년도 되지 않아 바이러스에 감연되었다. A형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B형 아버지는 노력했지만, H를 지키기 위해 이틀만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작년데 집을 찾아온 군인을 따라 나서면서 사진을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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