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이드의 아름다움은 대칭적인 형태에 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놀랍도록 정교한 모습에 연신 셔터를 눌러대었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한참을 정신이 팔려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가 카메라에 너의 얼굴이 들어왔다. 카메라도, 하다 못해 휴대폰도 손에 들지 않고 오롯이 알라이드를 바라보는 네 얼굴이 있었다.

 

 

"사진은 안 찍어?"

 

 

말을 건냈지만 조용했다. 처음에는 무시를 당한건가 살짝 당황했지만, 그 눈동자를 보고 알았다. 엄청 집중하고 있구나, 말도 안 들릴말큼. 나는 네가 놀라지 않게, 불러 세우는 일 없이 그저 가까이 다가갔다. 인기척을 느낀 네가 나를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눈이 곱게 접혔다. 무표정일 때는 쌩한 얼굴이 웃으면 순둥해졌다.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한번 말을 붙였다. 사진은 안 찍어?

 

 

"전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담으려구요."

"실제로는 또 언제 볼 수 있을 지 모르니까?"

"뭐 그런 것도 있고, 제가 사진을 잘 못 찍어서요. 쓸데없는 데 힘 빼는 거 같기도 하고..."

 

 

민망한 듯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잘 찍고 못 찍고가 어딨냐며 너스레를 떠는 나에게 네가 진지하게 말해왔다. 저는 진짜 못 찍어요. 심각하게요. 그렇지 않을 거라는 나와 몇번 실랑이를 하다가 이내 휴대폰을 꺼내든 너였다. 사진 하나 보여줄테니 그거 한 번 봐봐요. 짐짓 심각한 얼굴로 내민 사진은 라면이었다. 젓가락으로 라면 가닥을 한껏 들어올린 채 찍은 듯 했는데, 화면 상단부터 하단까지 라면 가닥만 찍어놓은 사진이었다. 나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게 뭐야? 클클거리는 내 손에서 휴대폰을 거두어 간 네가 비죽거렸다.

 

 

"거봐요, 못 찍는다고 했잖아요."

"알았어요."

"왜 사람을 못 믿어요, 그러니까."

"사진을 잘 찍고 못 찍고가 그렇게 중요한 지 몰랐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네가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네, 내가 왜 거기 그렇게 집착을 했지? 물끄러미 닿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해보이자, 네가 뒤로 돌았다. 다음 꺼 봅시다. 앞서 걷는 네 뒷모습이 혼자 보기 아까워, 나는 얼른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마음에도 담고, 기록으로도 남겨야지.

 

아무튼 함께 있으면 지루한 줄을 몰랐다. 사람이 이렇게 재밌을 수가 있는지. 재채기만 한번 해도 일주일 내내 그 귀여운 재채기가 생각나 웃을 수 있었다. 새로운 것을 알아간다는 것이 재미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스물 다섯이 넘어간 이후로 뭔가가 궁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너는 보물섬 같아서, 무엇이 숨겨져 있는 지 알고 싶어 안달이 났다.

 

오늘도 하나 알았다. 사진은 못 찍는구나. 그 순간 네가 뒤로 돌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를 보더니 금새 브이를 그리며 포즈를 취하는 네가 보였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못 찍지만, 찍히는 건 좋아하네.  카메라 너머의 네 얼굴처럼 나도 웃었다.

 

 

 

 

2018.08.25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레이션에는 긴장도 두려움도 동정심도 없었다. TV 화면 속의 양들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고 그 뒤의 트럭에서는 비닐 앞치마를 입은 남자들이 손에 바리깡을 든 채 내리고 있었다. 바뀐 화면에서 바리깡을 든 남자의 손은 무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양들의 살점을 함께 깎아냅니다. 영상과 달리 나레이션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에어컨을 켠 거실 소파 위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는 나의 TV에는 동물 복지를 다룬 다큐가 나오고 있었다. 털과 함께 가슴살이 뜯기는 거위,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너구리,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가는 토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뿐이었다. 양의 비명소리가 나오는 TV를 켜둔 채 냉장고로 간 나는 아이스크림과 스푼을 들고 돌아와 TV 화면을 돌렸다. 뭔갈 먹을 때 보고 싶은 영상은 아니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 후엔 이런 생각을 했다. 타인의 고통이란 이런거지.

 

 아마 그 사람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힘들다고 얘기해봤자 내 고통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린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어쩌다 만나서, 어쩌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어쩌다 친밀한 사이가 되었지만 결국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하는 말을 그 사람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우리가 싸우지 않는 대화는 점심 식사 메뉴나 오늘의 코디에 어울리는 신발을 고르는 것 정도였다. 혹은 누구 하나가 양보하여 함께 영화를 볼 때 라던지.

 

 그 사람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내 행동이 잘못된 것이었고 고쳐야 하는 것이었다. 다른 날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최선을 다해 충분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것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 내 고통을 그 사람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주길 바랐다. 나도 모르는 내 감정의 원인을 찾아 말로 정리해주기를 바랐다. 나도 그러지 못하면서.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더 힘들어져갔고, 휴대폰에서 서로의 이름을 지우기로 했다.

 

 아이스크림 뚜껑을 덮고 다시 채널을 돌리자 이불과 옷의 장식용 털과 키링이 된 거위, 너구리, 토끼, 양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는 단체의 대표가 참여와 협조를 부탁하고 있었다. 나는 한 사람분의 데이터가 지워진 폰을 들어 공손히 모으고 있는 대표의 손 옆에서 반짝이는 후원 전화번호를 눌렀다.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해줄 수 있는 건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전화 한 통 정도라는 사실에 자조하며.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강단 위의 연사가 뒤로 돌아섰다. 그녀는 손에 쥔 레이저 포인터를 만지작거리며 앞으로 나섰고, 조명 기사가 황급히 핀 라이트를 옮겨 그녀를 따라갔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알죠."


그녀의 등 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어떤 양이 자연의 섭리대로 태어났고, 어떤 양이 몸 속에 전선이 가득한 지 말입니다."


맨 앞 줄에 앉아 있던 사람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쪽으로 몸을 돌려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인공 양과 자연 교배로 태어난 양 두마리가 순진한 얼굴로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연단 위를 걷는 그녀의 발소리가 울려퍼졌다. 청중들이 숨을 죽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사뭇 진지해졌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도 계실 겁니다. 눈을 떴을 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


숨 죽이는 사람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약간의 경외와, 약간의 두려움.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일테였다. 그녀는 청중들의 시선에 지지 않기 위해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공존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하고, 함께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공동체로 있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름은 잘못이 아닙니다. 다름은, 그냥 다름일 뿐입니다."


정적이 도무지 깨질 줄을 몰랐다. 연사는 다시 처음 그녀가 양 이야기를 시작하던 자리로 돌아갔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서는 안됩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다리를 바꿔 꼬면서 팔걸이에 기대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부터, 저로부터 그 이해가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연사는 청중들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저는, 눈을 떴을 때부터 어른이었던 사람입니다."


순간, 박수 소리가 끊어졌다.

양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말을 하는 소년의 눈은 아주 까맣고 단호해서, ‘알고 있어도 말해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는 듯했다. 나는 그의 눈빛에 기분이 팍 상했다. 여름 밤 초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목격한 것은 우리집 양떼뿐이다. 예전에 돌봐 드리던 노인의 소개로 찾아간 이 소년이 아니었다면 우리집 양들이 그때 거기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방금 전까지 양들 사이에 서서 양들과 눈을 맞추고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그새 내려앉은 이슬을 눈치챈 소년이 잔뜩 인상을 쓰고 어깨를 툭툭 털었다. 그는 아주 피곤해 보였다. 나는 이 새벽에 자다가 끌려 나오다시피 한 그가 좀 불쌍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 또한 이 새벽에 당나귀를 타고 다리를 건너 그를 데려와야 했다. 따지고 보면 더 불쌍한 건 내 쪽이다. 내가 동물과 얘기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면 당나귀가 나를 개울가에서 걷어찰 때 욕을 퍼부어 주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누나가 건넨 유리병을 눈에 문지르며 소년을 흘겨봤다.


정말로 물어본 거 맞아?”


내 퉁명스러운 말투에 누나가 내 뒤통수를 갈겼다. 버릇없이 굴지 마! 누나는 언제나 그들을 동경했다. 소년을 포함해 마을에는 옛날부터 그런 사람들이 몇 있었다. 동물과 말이 통한다 거나 유난히 별을 읽는 눈이 밝고, 작물이 병에 들지 않게 지켜주는 사람들. 우리를 대할 때면 어색하게 얼굴이 굳고 어지간한 대가 없이는 우릴 도와주지 않았고, 또 아무리 작은 일이든 종이에 기록하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누나는 굳이 내 말투가 엄청난 모독이라고 느끼나 보다.


양들은 그 때 그 자리에 없었어요.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다시 거기로 데려가 주시죠.” 소년은 나를 깡그리 무시하고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는 짐짓 진지한 표정을 하고 초원으로 가는 지름길을 가리켰다. “이 길로 가도록 해요.” 안개는 아까보다도 훨씬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안개를 뚫고 작은 개울을 지나면 꽤 근사한 초원이 나온다. 밤에는 양들을 풀어 반딧불을 먹게 하는 초원이다. 동물 우리 뒤 오동나무 옆에는 우리가 사는 오두막이 있다. 다시 말하자면 어제 밤까지는 있었다. 오동나무도, 우리집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금니 삽니다.”

“없어요, 금니.”


역에서 또 그들에게 손목을 잡혔다. 어지간히 호구처럼 보이나 보다. 분주한 곳에서는 늘 인상을 쓰고 내 갈 길만 가려고 하는데 좀처럼 쉽지 않다.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도 이런 일이 생기다니. 금니 삽니다, 금니 삽니다 – 고개를 돌려보니 그들은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달라붙어 금니를 요구하고 있었다. 짝퉁 유니폼을 맞춰 입고 역사복원부에서 나왔다며 사기를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정부에서 직접 나온 경우는 거의 없고 불법적인 꿍꿍이가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단은 몇 년 전에 시작됐다. 누군가의 부주의로 바이러스가 섞인 파일이 다운로드 되고 연결된 파일들이 삭제되는 흔한 패턴이었다. 전례 없던 규모와 속도로 일어났다는 게 문제였다. 대부분의 기록이 전자화되어 있었기에 이는 전인류적인 재앙이었다. 야금야금 사라진 정보만큼이나 황당한 건 똑똑해야 하는 사람들조차 이 문제를 놀랍도록 뒤늦게 인정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들은 다시 종이에 정보를 기록해야 했고 마치 병아리가 된 불사조처럼 비극적으로 굴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연 끝에, 인체에 일정기간 이상 이식된 적 있는 금속에는 바이러스의 영향을 받지 않고 대용량의 정보를 저장하고 회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확히 어떤 기괴한 실험으로 이 사실이 발견되었는지는 교과서에서 읽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통사고나 관절염으로 심은 티타늄 칩이나 임플란트로 심은 이뿌리 같은 것이 CD, 블루레이, USB 등을 대체하게 됐다. 대신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이전에 인체에 이식된 적 있었던 금속만이 내성을 갖고 있었다. 당시 70억 인구 중 몸에 금속 두어 개를 붙이고 살던 사람들은 꽤 많았다.


연합정부는 임시방편으로 사람들에게 정부보조금을 주며 이 ‘바이오드라이브’라고 불리게 된 금속들을 회수하고, 새로운 수술이나 교정장치를 무료로 제공했다. 사기업이 바이오드라이브를 수집하는 건 불법이었지만 정부보조금보다 더 매력적인 조건을 내걸곤 했다. 정보를 클라우드에 저장하든, 파피루스에 써넣든, 인간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나보다.


임시방편이 ‘임시’인 동안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과학자들은 바이러스를 물리칠 방법을 찾지 못했고, 서버가 없는 세상에서는 연구도 협력도 더디게 진행됐다. 정부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퍼줄 보조금이 없었다. 반정부주의와 테러는 서버 없이도 잘만 이루어졌다. ‘황당한 퇴화라고 볼 수 있지. 아니, 어쩌면 진화일까.’ 역사복원부에서 일하시던 나의 할머니가 했던 말씀 중 하나다. 할머니는 병상에서 천천히 죽음을 맞이했다. 정부가 새로 달아준 인슐린 모니터가 불량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공무원이라서 가장 먼저 바이오드라이브를 회수당했던 할머니다. 퉁퉁 부은 손으로 나를 잡으시며 당신의 육신은 여기서 끝나지만 정신만큼은 ‘늘푸른 내마음의 고향’으로 간다 하셨다. 나는 할머니가 ‘영혼’이 아니라 ‘정신’이라고 말하셨던 걸 또렷이 기억한다.


지금 내 주머니 속에는 할머니의 금니가 있다. 금, 그 중에서도 치아를 대체하던 금니는 안정적인 구조 덕분인지 용량과 안정성 면에서 최고의 바이오드라이브였다. 암시장에서 요령 있게 굴기만 한다면 나도 ‘늘푸른 내마음의 고향’ 정도에는 문제없이 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빠져나오니 8년 전부터 고장나있는 기온조절계가 삑삑거리고, 광장 시계탑 아래의 수은계가 41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길에서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누워있었고 얼음을 파는 리어카에도 어김없이 ‘금니 삽니다’가 붙어 있었다. 정오가 되면 시계탑에서 정부의 보여주기식 복지의 극치인 냉각 가스가 배포될 예정이었다. 정오에 시계탑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몸을 숨길 곳이 마땅치 않아 열사병을 앓은 지 오래되어 이 곳이 도시인지 늘푸른 내마음의 고향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허접한 양산을 움켜쥐며 빠른 걸음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손톱만한 땀을 빼곡히 흘려가며, 나는 멸종한 동식물과, 언어와, 문화, 예술과 역사를 생각했다.

“역사복원부 직속 경찰입니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갑자기 진짜 유니폼을 입은 여자가 나를 세웠다. 벌써 시청이 코앞이었다.

“너무 더워요. 저는 시청 청사 안에 볼일이 있습니다. 사망신고를 하러 가고 있어요.” 최대한 슬픈 얼굴을 해 보였으나 경찰은 내 앞을 막아섰다.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현재 거주지 주소가 어떻게 되십니까?”

“신분증은 집에 뒀습니다. 역사 동쪽의 공동주택에 삽니다.”

“공동주택이요? 그 곳은…”

“맞습니다. 공무원과 그 가족들이 사는 건물입니다.” 나는 경찰의 말을 자르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역사복원부 소속이라 하셨지요. 저와 이웃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이사를 가야합니다. 공무원이던 가족이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사망신고서를 뒤늦게 제출해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72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생체데이터도 제출하려고 했지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경찰은 사망신고서를 읽어보더니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이 이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가족 사이셨군요. 늦기 전에 제출하십시오.” 서류를 돌려 받자 마자 나는 고개를 끄덕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돔 형태의 시청 지붕이 지글거리고 있었다.   


“망자에게 애도를.” 경찰이 혼잣말 하듯 내 쪽을 향해 말했다. 나는 돌아보지 않고 - 망자에게 애도를 - 입 안으로 그 문장을 읊었다. 애도할 일은 앞으로도 더 많이 남았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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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잡이별(차글)  (1) 2018.08.25

 

 

 프리스비는 재빨리 그녀가 찾는 병을 건네준다. 병 속의 유리 구슬이 도르륵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구슬 구르는 소리가 다른 이에게 들릴까 병을 꽉 끌어 안고 프리스비의 가게를 나섰다.

 

 작고 푸른 유리 구슬은 그녀의 여덟살 난 아들의 것이었다. 장난감이라곤 나뭇가지나 열매의 단단한 껍질이 대부분인 이 가난한 바닷가 마을에서 유리 구슬은 비싸고, 보기 드문 것이었다. 한 달 쯤 전 이름도 알 수 없는 먼 나라에서 왔다는 외국인 관광객이 꺼내놓은 유리 구슬 다섯 개에 온 마을의 아이들은 마음을 빼앗겼다. 투명하고 단단하고 푸른 빛 속에 온갖 색을 품고 있는 그 구슬은 마치 지구 같았다. 그녀가 어린 시절 마음을 뺏겼던, 우주에서 본 지구. 푸르고 오묘하고 아름다운 구. 외국인이 두고 떠난 다섯 개의 구슬은 마을 아이들의 손에서 손으로 돌아다녔다. 그 중 두 개는 깨졌고, 하나는 사라졌으며, 두 개는 여전히 아이들의 놀잇감으로 남아있었다.

 

 그 하나의 구슬이 사라진 즈음이었다. 그녀의 아들이 먼 나라 이야기를 자주 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 나라에는 얼음 위에 사는 날지 못하는 새가 있다고, 밤 하늘을 밝히는 분홍빛 달이 있고, 하루종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있다고 꿈 같은 얼굴로 종알거렸다. 처음에는 아들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던 그녀는 어느 순간 무서워졌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들의 볼이 점점 더 붉어지고, 눈이 까맣게 빛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십오년 전 사라진 언니의 것과 같았다.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언니는 어린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며 얼굴을 빛내곤 했다. 아들에게서 언니의 얼굴을 본 그녀는 아들의 생활을 살폈다. 집을 나선 아들의 뒤를 몰래 따르며 들키기를, 혹은 들키기 않기를 바랐다. 그녀의 미행이. 그리고 아들의 비밀스러운 일이.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그녀는 아들이 변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들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프리스비의 중고품 가게에 들어가 도자기로 된 병들을 쓰다듬었다. 그 중 입구의 이가 나가고 별 특징 없이 눈에 띄지 않는 잔금이 간 흰 병 안에서 구슬을 꺼냈다. 아마 사라졌다는 하나의 구슬일 것이었다. 아들은 구슬을 손바닥 위에서 굴리고, 햇빛 알에서 오래도록 바라보고, 입 속에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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