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는다.”

내 말에 제이는 액체가 되어 흘러내리는 메로나를 호르릅 핥았다. 더운데 꼭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야해? 땀으로 축축한 등을 식히려고 티셔츠 뒷자락을 펄럭이며 제이를 흘겼다.

좋잖아, 날씨랑 싸우는 기분?”

햇빛이 쨍-하고 내리쬐는 중학교 운동장 철봉 위에서 제이는 또 한 번 녹은 아이스크림을 후르릅 마시고 키키키 하고 웃었다. 제이를 처음 만났을 때 저 웃음소리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키키키. 일부러 하나하나 끊어 내는 듯한 소리.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아빠의 직장따라 이 도시로 이사를 왔고, 2학기가 시작되며 전학한 이 학교에서 제이를 처음 만났다. 태어날 때부터 숫기라곤 없는데다가 깊어진 사춘기에 더욱 소심했던 나는 1학기 동안 이미 무리를 만든 아이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앞에서 네 번째 줄, 복도 창문 사이 좁은 벽 옆의 책상에 앉아 수업 시간이고 쉬는 시간이고 학급문고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 나가는 것이 일과였다. 그런 나날이 삼 주 쯤 지났을까, 이미 수없이 읽어 책장 사이가 부푼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읽던 점심시간이었다. 여전히 혼자였던 내 눈 앞에 불쑥 휴대폰 하나가 들어왔다.

우리 집 강아지 사진 볼래?”

하얗고 복슬거리는 털에 초코칩처럼 까만 눈동자가 콕콕 박혀있는 강아지 사진을 내밀며 제이는 말했다.

얘 이름도 해리다? 너 해리 포터 좋아하는 거 같아서 키키키

. ”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몰라 겨우 하는 소리를 낸 내 앞자리에 앉은 제이는 제 얘기를 쏟아냈다. 우리 집은 여기서 버스타고 다섯정류장 가야해. 원래 학교랑 가까웠는데 세달 전에 이사갔어. 그래서 전학갈 수도 있었는데 내가 전학가기 싫다고 떼써서 이겼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해서 좀 싫긴한데 그래도 난 우리 학교 운동장이 좋아. 우리집 식구는 일곱이야, 할머니랑 부모님이랑 오빠랑 나랑 강아지 두 마리. 우리 오빠 이름은 아이다? 에이비씨디이에프지에이치아이제이. 키키키. 사실 뻥이야. 오빠 이름은 평범해, 제훈. 우리집 강이지 귀엽지? 얜 해리고 얜 샐리야.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에 나오는 이름이라는데 난 본 적은 없어. 그냥 너한테 말 걸고 싶어서 해리 포터의 해리인 척 했어. 키키키. 근데 넌 해리 포터에서 누가 제일 좋아? 난 사실 해리는 별로고 루핀 교수님이 좋아. 멋지지 않아 늑대인간?

그 때의 나는 응,응 하는 대답만 반복했다. 제이는 생글거리면서도 중간중간 내 표정을 살폈다. 그 눈빛이 고마워서 나는 제이의 표정을 따라 점점 웃었다.

그 후로 오 년동안 우리는 내내 붙어다녔다. 언젠가 제이에게, 왜 삼 주나 지나서 나에게 말을 걸었느냐고 물었을 때 제이는 또 키키키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동안 널 지켜보고 있었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편한 아이라면 방해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리고 나랑 잘 지낼 수 있는지도 알아봐야했고, 혹시 사이코패스가 아닌지도 알아봐야했고 키키키. 장난스레 끝난 말이지만 제이스럽다고 생각했다. 다른 아이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혼자인 나를 신경썼겠지. 궁금증에 급히 다가오기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기분인지를 우선해 찬찬히 살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정도 확신이 생겼을 때 제이는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제이는 그런 아이였다. 생각없이 밝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것까지 생각하는.

 

이거 봐, 개구리 같지? 개굴.”

연두색 아이스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쫙 펴며 제이가 말했다. 유독 길고 얇은, 하지만 마디가 도드라지는 제이의 손 끝에 끈적이는 방울이 맺혀있다. 개굴. 혼자 개구리 울음소리를 내며 즐거워하는 제이가 재밌어서 나도 피식 웃었다.

너 그러다 진짜 개구리 된다.”

싱거운 농담을 했더니 제이는 더 즐거운 표정이 되어서 정말? 그럼 안되지.” 하며 손을 흰 티셔츠에 슥슥 문댄다.

하지만 이미 굳어버린 메로나는 제이의 손과 티셔츠 모두에 달라붙었다. 안되겠다, 개구리 되기 전에 나 얼른 손 씻고 올게. 후다닥 뛰어가던 제이는 장난기가 톡 튀어나왔는지 갑자기 쪼그려앉더니 개구리처럼 폴짝 뛴다. 그리곤 날 돌아보고 개굴하고 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크하하 웃었고 만족한 얼굴로 다시 뛰어가는 제이의 뒷모습에서 키키키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개굴. 제이를 따라 개굴하고 울어 보았다. 개굴 개굴. 두 음절을 입속에서 굴리다 보니 작년 여름 가족여행으로 떠난 지리산 캠핑장에서 들었던 개구리 소리가 떠올랐다. 모두가 잠든 후에 밖으로 나온 나는 캠핑 의자에 누웠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 그 여름 바람 끝에 풀냄새가 묻어있는 싱그러운 여름밤의 공기와는 달리, 내 머리는 무거운 안개로 가득 차있었다. 곧 고삼 수험생이 된다는 걱정과 책임없는 십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 미지의 이십대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눌렀고 앞으로 뭘 하는 것이 좋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아니 내가 좋아하는 일은 뭘까 하는 고민이 나를 덮었다. 여행자에게는 길잡이별이 있다는데, 나의 길잡이별이 있다면 아주 작은 신호라도 보내주길 바라며 오래도록 하늘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하늘엔 너무나 많은 별이 있어서 어디로 가야할 지는 알 수 없었다.

 

도아야.”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햇빛 아래 제이가 서 있었다. 해가 너무 강해서, 그 아래 있는 제이는 반쯤 투명해 보였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하며 다가오는 제이의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가 물에 젖어있다. 머리에서 떨어진 물은 볼과 목을 타고 내려와 티셔츠의 목과 어깨를 적시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세수 좀 했어. 키키키.

제이야, 넌 뭐하고 살거야?”

철봉 위에 앉아 발을 까닥이며 나는 제이에게 물었다. 까만 운동화에 모래가 묻어 있다.

? 난 맛있는 거 먹고, 자고 싶은만큼 자고, 우리 해리랑 샐리랑 뒹굴거리면서 살지 뭐.”

 아니 그런거 말고. 어떤 전공을 선택할지, 졸업하고 무슨 일을 할지 그런 거말야.”

몰라, 난 그냥 잘 살래.”

난 내가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뭐하고 살지?”

진지하게 내 제일 큰 고민을 이야기하려는데 제이는 듣는지 마는지 그네를 타기 시작한다. 나는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개학하면 당장 수시원서 써야하는데 큰일이야, 다른 애들은 이미 가고 싶은 학교나 학과를 정했던데. 넌 어디 지원할지 결정했어?

아니 아직. , 네가 보고 싶어하던 영화 어제 개봉했던데 우리 내일 그거 보러 갈래?”

발을 굴러 점점 더 높이 올라가던 제이가 말을 돌린다. 고삼이 된지 오개월이 지났는데 제이와 나는 진로에 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한 적이 없었다. 어디에서 누군가와 얘기하더라도 빠지지 않는 주제라 제이와 있는 시간동안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이야기로도 충분히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의 나에게 이 문제는 너무 어려워서 제이와 함께 답을 찾고 싶었다.

내 말 좀 들어봐. 난 뭘 해야할지 모르겠다니까, 수능도 얼마 안남았는데 그 때까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어.”

근데 영화 주인공 진짜 예쁘더라. 이번에 헤어스타일 바꾼 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아. 그지? 내일 영화 몇 시에 볼래? 지금 예매할까?”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자기 할말만 하던 제이가 발을 뻗어 그네를 멈췄다. 아직 조금씩 흔들리는 그네 위에서 휴대폰을 꺼내 두드리기 시작한다. 너 씨지비가 좋아, 롯데시네마가 좋아? 점심 먹고 세시쯤 괜찮지? 자리는 늘 하던 것처럼 젤 뒷자리로 할게. 내일 만나서 밥먹고 영화보고 내가 저번에 가자던 카페 가자. 거기 메론빙수가 맛있대.

영화 예매에만 집중하는 제이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입꼬리에 힘이 들어간다. 혼자 오래 고민하다 꺼낸 말인데 이렇게 무시당하자 나는 내가 줄이 하나 끊어진 그네만도 못하게 느껴졌다.

됐다. 예매했어. 그런데 너무 덥다아. 나 땀나는 거 봐. 우리 실내로 갈까?”

화가 나서 대답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보는 제이의 시선을 느꼈지만 일부러 무시하며 앉아있던 철봉에서 뛰어내렸다. 분명 굳어있을 내 표정을 보이고 싶지 않아 운동장 바닥을 보며 구겨진 엉덩이를 툭툭 터는데 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생겼지? 할 일.”

제이를 보자 반짝, 하고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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