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옛날 그에게 읽고 쓰기를 가르쳐준 어머니의 필적이었다. 우아하지만 날렵한 그 곡선들은 어머니의 성품을 똑 닮았다. 고요하지만 성격이 급한 분이셨지. 그는 생각하며 수첩을 덮었다. 더 읽어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까. 안 그래도 그는 온종일 어머니와 관련된 기억들이 떠올라 어지러운 참이었다. 가장 마지막 기억은 몇 년 만에 삭발하고 나타난 그의 머리를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쓸어넘기던 어머니의 손길이다. 하나도 놀라지 않은 얼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인 건 오히려 그 자신이었다. 전부 알고 계셨구나. 철자를 틀릴 때마다 찰싹찰싹 등을 때리던 그 손으로 이제는 당신보다 키가 더 커버린 자식의 민머리를 쓰다듬던 어머니. 굳이 안 도망갔어도 될 걸 그랬다. 마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어머니는 그때 작게 웃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짧은 재회가 지나갔고, 쇠약해져 누운 것은 어머니였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병원 복도에서 몇 번이나 주저앉은 것은 그였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전보를 받았고, 며칠을 달려 만난 어머니의 육신은 마침내 급하게 마음을 먹을 일이 없는 곳에 누워 고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앞으로 남겨진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일단 가져가라며 떠맡은 상자에는 몇십 년 분량은 족히 될 수첩들이 있었다. 가죽 노트부터 판촉물용 메모지까지, 어마어마한 양을, 똑같은 필적으로 채운 어머니. 무엇이 중요한지 구별해 내기에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 자신에게 버려지듯 넘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는 이미 네 번째 상자를 뜯어보고 있었다. 생전의 어머니는 대체 어떤 일상을 지냈기에 이렇게 믿을 수 없이 많은 글을 남겼을까? 이 글은 다 무엇일까? 기상 예보가 적힌 페이지 뒤에는 오늘의 장 볼거리가 적혀 있고, 받는 사람이 계속 바뀌는 편지와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날의 일기, 백과사전에서 무작위로 베껴온 듯한 빽빽한 설명. 어머니에게는 정신적 문제가 있었던 걸까? 일주일을 꼬박 매달렸지만, 어머니의 필기는 끝이 없었고, 이제 그가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어둠 속으로는 어머니의 필적이 둥둥 떠올랐다. 


그렇게나 많은 글을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없었다. 그에 관한 내용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전날 삶았던 감자가 유난히 물렀다거나, 볼리비아의 우기에 대한 기록은 있었지만, 어머니가 혼자 낳아 몇 년간 길러낸 그에 대한 언급은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슬픈 걸까? 머리까지 오던 긴 머리를 뎅강 잘라버리고 어머니에게 혼날 것이 무서워 다락에 숨던 날을 회상했다. 쿰쿰한 먼지 냄새를 맡다 보니 혼나면 어쩌지 하며 졸이던 마음이, 꾸짖어도 좋으니 나를 찾아내라고, 나를 보고 화를 내 달라고 소리치고 싶은 심정으로 바뀌었다. 어머니는 그가 어디에 숨었는지 알면서도 찾지 않았었다. 머리칼을 뭉텅이 그대로 다락에 버려두고 겨우 기어 나왔었지. 그 날 저녁에도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그에게 글씨 쓰기를 가르쳐 주셨다. 마지막 날 몰래 들른 다락방에는 그 뭉텅이가 그대로 있었다. 그 뭉텅이만큼의 머리가 또 한 번 자라는 동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아니, 나는 조금도 슬프지 않아. 

+ Recent posts